[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파주에게' 공광규 (2021.06.10)

■ 파주에게 /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 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 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

[명시감상] '철조망에 걸린 편지' 이길원 (2021.06.10)

■ 철조망에 걸린 편지 / 이길원 어머니, 거친 봉분을 만들어 준 전우들이 제 무덤에 철모를 얹고 떠나던 날 피를 먹은 바람만 흐느끼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총성은 멎었으나 숱한 전우들과 버려지듯 묻힌 무덤가엔 가시 면류관 총소리에 놀라 멎은 기차가 녹이 슬고 스러질 때까지 걷힐 줄 모르는 길고 긴 철조망 겹겹이 둘러싸인 덕분에 자유로워진 노루며 사슴들이 내 빈약한 무덤가에 한가로이 몰려오지만 어머니, 이 땅의 허리를 그렇게 묶어버리자 혈맥이라도 막힌 듯 온몸이 싸늘해진 조국은 굳어버린 제 심장을 녹일 수 없답니다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그렇게 마시고도 더워질 줄 모르는 이 땅의 막힌 혈관을 이제는 풀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식어버린 제 뼈 위에 뜨거운 흙 한줌 덮어줄 손길을 기다리겠습니다 무덤가에 다투어..

[명시감상]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2021.06.09)

■ 꽃을 보듯 너를 본다 / 나태주 봄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아직은 겨울이지 싶을 때 봄이고 아직은 봄이겠지 싶을 때 여름인 봄 너무나 힘들게 더디게 왔다가 너무나 빠르게 허망하게 가버리는 봄 우리네 인생에도 봄이란 것이 있었을까? ? 행복한 삶의 비결 중 하나는 소소한 즐거움을 끊임없이 느끼는 것이다. ㅡ Irish Murdoch 영국 소설가(1919~1999) ?

[명시감상] '어미' 조오현, 지독지정 舐犢之情 (2021.06.09)

■ 어미 / 조오현 어미는 *목매기 울음을 듣지 못한 지가 달포나 되었다 빨리지 않는 젖통이 부어 온몸을 이루는 뼈가 자리다 통나무 구유에 여물 풀냄새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긴 널빤지를 죽죽 깔아서 놓은 마루에 갈대를 걸어 만든 자리도 번듯번듯 잘생긴 이집 가족들도 오늘은 꺼무끄럼하다 낯설다 다 알고 있다 풀을 뜯어먹고 살 몸마저 빼았겼음을, 이미 길들여지고 있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어미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것임을, 곧 어미를 잊을 것임을 어미는 젖을 떼기도 전에 코를 꿰었다 난생 첨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쇠똥구리 한 마리가 자기몸 두 배나 되는 먹이를 굴리는것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어린 눈에 뿔을 갖고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어미도 미웠다 그러나 ..

[명시감상] '적멸을 위하여', '절간 이야기', '아지랑이', '비슬산 가는 길', '고목 소리' 조오현 (2021.06.08)

■ 아지랑이 / 조오현 (1932~2018)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아득한 성자 /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명시감상] '강물' 오세영, '백담사', '나 없는 세상', '논두렁에 서서' 이성선 (2021.06.07)

■ 강물 /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 나 없는 세상 / 이성선 ​나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 속에는 산 그림자 여전히 홀로 뜰 것이다 ■ 논두렁에 서서 / 이성선 갈아 놓은 논고랑에 고인 물을 본다 마음이 행복해진다 나뭇가지가 꾸부정하게 비치고 햇살이 번지고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잠기고 나의 얼굴이 들어 있다 늘 홀로이던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누가 높지도 낮지도 않다 모두가 아름답다 그 안에 나는 거꾸로 서 있다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인 것처럼 아프지 않다 산도 곁에 거꾸로 누워 있다 늘 떨며 우왕좌..

[명사수필] '봄' 피천득 (2021.06.07)

■ 봄 / 피천득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天癡)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이러한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렇게 읊은 시인도 있다. 이들은 사치스런 사람들이다. 나같이 범속(凡俗)한 사람은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두꺼운 옷을 벗어 버리는 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띠우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그림이나 조각을 들여다볼 때, 잃어버린 젊음을 안개 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을 업(業)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 글을 통하여 먼 발자취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명시감상] '유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2021.06.02)

■ 유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 년 만 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6월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 2021.06.02

[명시감상] '소주병', '애장터', '얼굴 반찬',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2021.06.02)

■ 소주병 /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출처] 시집 《소주병》 ■ 애장터 / 공광규 입을 꾹 다문 아버지는 죽은 동생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앞산 돌밭에 가 당신의 가슴을 아주 눌러놓고 오고 실성한 어머니는 며칠 밤낮을 구욱구욱 울며 마을 논밭을 맨발로 쏘다녔다 비가 오는 날마다 누군가 밖에서 구욱구욱 젖을 구걸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누구유!” 하며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그때마다 산비둘기 몇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젖은 마당에 상형문자를 찍어놓고 돌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가 그걸 읽고 돌밭으로 가..

[문학산책] '청초 우거진 골에' 곡(哭)하지 말라.. 임제, 백호문학관 (2021.06.01)

■ 청초 우거진 골에 / 백호(白湖) 임제 (林悌)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난이 잔(盞) 자바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현대어 풀이]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 하노라 푸른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잠을 자느냐 누워 있느냐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 두고 흰 뼈만 묻혀 있느냐 술잔을 잡고 권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 하노라 푸른 풀 우거진 골짜기에 자고 있느냐 누워 있느냐 젊고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에 두고, 창백한 백골만 묻혀 있는 것이냐 술잔을 잡아 권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지은이] 임제 (白湖 林悌1549-1587) :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기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