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지나온 길 가야 할 길, 모든 것은 지나간다 (2021.05.12)

■ 지나온 길, 가야 할 길 아이를 나무라지 마라 다 지나온 길인데... 노인을 비웃지 마라 다 가야 할 길인데... 지나온 길 가는 길 둘이서 함께 하는 여행길 지금부터 가야하는 오늘의 길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인 것을... ㅡ 에이 로쿠스케 ■ 모든 것은 지나간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일출의 장엄함이 아침 내내 계속되지는 않으며 비가 영원히 내리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일몰의 아름다움이 한밤중까지 이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땅과 하늘과 천둥, 바람과 불, 호수와 산과 들, 이런 것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만일 그것들마저 사라진다면 인간의 꿈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인간의 환상이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여라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ㅡ 세실 프란시스 알렉산더 (..

[명시감상] '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2021.05.11)

■ 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슨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

[명시감상] '어머니 기억' 신석정, '오월의 어느 날' 목필균,​ '오월의 시' 이문희 (2021.05.11)

■ 어머니 기억記憶 / 신석정 ㅡ 어느 소년少年의 ㅡ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는 이내 메아리로 되돌아와 내 귓전에서 파도처럼 부서졌다. 아무리 불러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고, 내 지친 목소리는 해풍海風속에 묻혀 갔다. 층층나무 이파리에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었다. 쏴아… 먼 바닷소리가 밀려오고, 비는 자꾸만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짙푸른 동백잎 사이로 바다가 흔들리고, 우루루루 먼 천둥이 울었다. 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오리..

[명시감상] '못 위의 잠' 나희덕,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 (2021.05.10)

■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

[명시감상] '겨울행' 이근배,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함동선 (2021.05.10)

■ 눈 감으면 보이는 ■ 겨울행 / 이근배 1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2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당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꺾던 눈밭의 당신의 언 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명시감상] '파주에게' 공광규, '철조망에 걸린 편지' 이길원 (2021.05.10)

■ 파주에게 /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 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 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

[명시감상] '오월 어느 날' 목필균, '5월의 시' 이문희 (2021.05.02)

■ 오월 어느날 / 목필균 산다는 것이 어디 맘만 같으랴 바람에 흩어졌던 그리움 산딸나무 꽃처럼 하얗게 내려앉았는데 오월 익어가는 어디쯤 너와 함께 했던 날들 책갈피에 접혀져 있겠지 만나도 할 말이야 없겠지만 바라만 보아도 좋을 것 같은 네 이름 석자 햇살처럼 눈부신 날이다 ■ 5월의 시 토끼풀꽃 하얗게 핀 저수지 둑에 앉아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는 한 덩이 하얀 구름이 되고 싶다 저수지 물 속에 들어가 빛 바랜 유년의 기억을 닦고 싶다 그리고 가끔 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 저수지 물위에 드리워진 아카시아꽃 향기를 가져다가 닦아낸 유년의 기억에다 향기를 골고루 묻혀 손수건을 접듯 다시 내 품안에 넣어두고 싶다 5월의 나무들과 풀잎들과 물새들이 저수지 물위로 깝족깝족 제 모습을 자랑할 때 나는 두 눈을..

[명시감상] '이웃' 이정록 (2021.04.25)

■ 이웃 /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에까지 갔다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생명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 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소설읽기] '자유인' 김성한 (2021.04.23)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2) 《무명로 장씨일가》에 실려있는 김성한의 단편소설『자유인』을 읽었다. ◆ 자유인 / 김성한 며칠 전에 교무 부장으로 신임한 이광래는 흰테 안경 너머로 실내를 휘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시원한 놈은 하나도 없었다. 낫살 먹었다는 교감은 무골충이요, 다른 교원은 대개가 삼십 전후의 어린애들이었다. 그 중에도 여교원은 문제도 안 되었다. 이만하면 가히 이 따위들은 쥐고 흔듦직하였다. "우선……."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내려도 오지 않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는 손목을 기점으로 뿔뿔이 헤어진 다섯 손가락을 상하로 흔들면서 "이 선생" 하고 불렀다. 수학 교사 이세기(李世基)는 일학년 교과서를 펼쳐 놓고 다음 시간에 배워 줄 연습 문제가 아무래도 풀리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물..

[소설읽기] '육인 공화국' 류주현 (2021.04.22)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2) 《무명로 장씨일가》에 실려있는 류주현의 단편소설『육인 공화국』을 읽었다. ◆ 육인 공화국 / 류주현 (발췌) 모터 보트는 갑자기 속력을 줄었다. 선체가 기우뚱하면서, 꼬리를 긋던 흰 물살이 옆으로 누인 활처럼 휘기 시작했다. 끽, 끽, 끼이륵 하고 갈매기 한 쌍이 숨바꼭질을 하듯 희뿌연 하늘로 치솟았다. 그놈들은 꼭 나비가 날 듯 호로리허리리 날고 있다. "쌍쌍인 모양이지!" 목에다 노리끼리한 타월을 걸친 장(張)군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놈들두 국적이라는 게 있을까?" 머리털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역시 장군의 말이다. "그런 거추장스런 건 없을 거야. 아마 아나키스트들일지두 모르지." 이 역시 장군 혼자의 말이다. "아나키스트, 살벌한 표현일까? 보헤미안!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