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들꽃 언덕에서' 유안진 (2021.05.30)

■ 들꽃 언덕에서 / 유안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감상] 저 언덕에 하느님이 계실까.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을 한 번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과 삶은 달라진다. ‘값비싼’ 걸 소유한 상태를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가격(price)을 가치(value)보다 더 높은 데 두지만, 최상의 것은 원래 값이 없다(priceless).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 ‘값없는’ 들꽃들 속에 신이 살고 있다. 하늘의 척도는 인간의 척도와 다름을 알았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아마도 이런 생각을 말미에 숨겨두었을 것..

[짧은 수필] '오월' 피천득(2021.05.21)

■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실료애정통고)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따뜻한 이야기] '사람 때문에 마음이 다칠 때' 정희재 (2021.05.20)

■ 사람 때문에 마음이 다칠 때 / 정희재 누구나 인생의 한 시절은 싸움닭처럼 격렬하게 세상과 맞서는 시기가 있다. 화살의 방향이 외부로 향하든, 내부로 향하든 상처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러나 상처 받지 않고서야 약을 찾을 일도 없다. 한때는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 ‘향수’를 듣다가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이란 대목에 이르면 가슴이 아렸다. 뜨거운 피가 전횡하던 옛 시절이 생각나면서 꽉 찬 회한의 그늘에 들어서듯 마음이 사무쳤다. 함부로 쏜 화살. 젊은 날의 치기를 비유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그 화살은 타인을 향해서도 발사됐지만, 그보다 더 자주, 더 깊이 스스로의 가슴에 꽂히는 일이 많았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

[따뜻한 이야기]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장영희 (2021.05.20)

■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 장영희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덥다. TV를 봐도 신문을 봐도 온통 슬프고 어두운 소식뿐, 어디 한 군데 상큼한 구석이 없고 기분도 날씨처럼 칙칙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오후에 어느 대학신문에서 전화가 걸려와 나의 ‘행복론’에 대해 말해달라고 한다. 무슨 번지수 틀린 소리인지, 불쾌지수가 99쯤 되는 날씨에 웬 ‘행복’ 운운하는가 말이다. 대답이 군색하여 하루쯤 생각할 여유를 달라 하고, 학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신촌로터리로 들어서는데 차의 휘발유가 바닥나서 자꾸 노란 경고등이 들어오고 있었다. 휘발유 넣는 일조차 번거로워 게으름을 피운 탓이다. 부랴부랴 학교 근처 주유소로 들어갔다. 3만 원 이상 주유하면 커피와 자질구레한 선물을 주기 때문..

[명시감상] '뼈저린 꿈에서만' 전봉건.. 모정의 세월, 그리운 어머니 (2021.05.18)

■ 뼈저린 꿈에서만 / 전봉건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속에 빛나는 돌맹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큰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

[명사수필] '유쾌한 오해' 박완서 (2021.05.18)

■ 유쾌한 오해 / 박완서 전동차 속에서였다. 아직도 한낮엔 무더위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3호선 전동차 안은 쾌적할 만큼 서늘했고 승객도 과히 붐비지가 않았다. 기술의 발달 때문인지, 경제성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1호선보다는 2호선이 더 쾌적하고 2호선보다는 3,4호선이 더 쾌적한 걸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늘 2호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약간은 샘도 났다. 내 옆자리가 비자 그 앞에 서있던 청년을 밀치고 뚱뚱한 중년 남자가 잽싸게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넉넉하던 자리가 꽉 차면서 내 치맛자락이 그 밑에 깔렸다. 약간 멋을 부리고 나간 날이라 나도 눈살을 찌푸리면서 치맛자락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꼼짝도 안 했다. 여간 무신경한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별 수 없어 그 남자를 툭툭 치면서 내 치맛자락이 ..

[명시감상]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2021.05.17)

■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이다 [이해와 감상] 우리는 외로울 때,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자문자답(自問自答)할 때가 있다. 허공에 대고 헛웃음을 웃을 때도 있다. 방황하고 고뇌하며 무언의 기도를 할 때도 있다. 삶이 막막할 때 그..

[명시감상] '조팝나무 꽃' 김종익 (2021.05.17)

■ 조팝나무 꽃 / 김종익 식장산 한적한 계곡 오르다가 조팝나무 하얗게 핀 군락 만나 왈칵 눈물나도록 반가웠다 어린 시절 누나 등에 업혀 오르내리던 언덕 길에 반겨주던 꽃 오랜만에 만난 누나인 듯 어루만지며 서로 안부 물었다 조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던 시절 그 누나 조팝나무꽃 하얗게 어우러진 고개를 넘어 시집가다 자꾸 뒤돌아보면 눈물 짓던 한번 헤어지고 만나지 못한 누나 몇 번 철책선에 가서 그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 이름 불렀었지만 메아리 되돌아오고 눈물을 삼키느라 목이 메었는데 오늘 조팝나무 꽃에 소식 전해준다 누나 등에 업혀 응석부리던 나도 이젠 머리 하얀 조팝나무 되어 서 있다 / 2021.05.17 편집 택

[명시감상] '민지의 꽃' 정희성 (2021.05.17)

■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꽃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ㅡ 시집 《시(詩)를 찾아서》(2001)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민지의 모습을 통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도 순수하고 맑은 시선으로 바라..

[명시감상] '여행자' 박노해, '여행' 도종환, '여행은 때로' 김재진, '여행으로의 초대' 김승희 (2021.05.16)

■ 여행자 / 박노해 여행을 나서지 않는 이에게 세상은 한쪽만 읽은 두꺼운 책과 같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밖의 먼 곳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 나 자신마저 문득 낯설고 아득해지는 그 먼 곳으로 하지만 낯선 땅이란 없다 단지 그 여행자만이 낯설 뿐 가자 생의 여행자여 먼 곳으로 저 먼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깊은 어둠 속으로 빛나는 길을 따라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나 자신에게 가장 낯선 자인 나 자신을 탐험하고 찾아내는 것 그 하나를 찾아 살지 못하면 내 생의 모든 수고와 발걸음들은 다 덧없는 길이었기에 ■ 여행 / 도종환 처음보는 사람과 한 자라에 앉아서 먼 길을 갔습니다 가다가 서로 흔들려 간혹 어깨살을 부대기도 하고 맨다리가 닿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몇마디씩 말을 주고받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