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뼈저린 꿈에서만 / 전봉건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속에 빛나는 돌맹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에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 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큰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러고도 더 많은 흐른 세월이
가로 세로 파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려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십육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ㅡ 남북으로 헤어져 보지 못하고 살다가 이젠 고인이 되셔서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쓴 시. 전봉건 시인은 1928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 6.25때 월남, 1988년 별세하였다.
☆ 전봉건(全鳳健, 1928.10.5~1988.6.13)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출생. 평양 숭인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후 남하, 교원생활을 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 1950년 《사월(四月)》 《축도(祝禱)》 등을 《문예(文藝)》에 발표, 추천을 받음으로써 문단에 등단. 주요 작품으로는 《사랑을 위한 되풀이》 《검은 항아리》 《속의 바다》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전봉건 시선》 《피리》 《북의 고향》, 시에 《너와 구름과 나》 《마지막에 누구도》 《손》 《태양》 《새벽》등이 있다.
/ 2021.05.18 편집 택
https://youtu.be/bm1HyYfJP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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