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씨뿌리다' 이동훈 (2021.07.03)

■ 씨뿌리다 / 이동훈 민들레 씨나 졸참나무 씨나 우리 동네 김 씨나 씨의 족속이긴 마찬가지인데 민들레 씨는 새가 먹고 졸참나무 씨는 다람쥐가 먹고 동네 김 씨는 혼자 먹는다 먹고 싼 것이 또 씨가 되어 씨로 열매 맺고 씨로 나누어 먹고 씨로 돌아오는 것이니 씨 뿌리는 일은 과연 생산적이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몹쓸 짓은 씨 말리는 일이다 우리 동네 김 씨는 민들레 씨보다 부지런해 보이고 졸참나무 씨보다 힘세 보이지만 땅만 파는 농부라는 이유로 쉰이 다 되도록 총각이다 오늘도 씨불씨불하는데 씨 뿌리지 못해 말로만 씨부리는 탓이다 ㅡ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 (문학의 전당, 2014) 中에서 ◇ 이동훈 시인 1970년 경북 봉화 출생 2009년 월간 《우리시》 등단 시집 / 『엉덩이에 대한 명상』 [감상과..

[소설읽기] '개밥' 주요섭 (2021.07.02)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22) 《물레방아, 사랑 손님과 어머니, 백치 아다다》에 실려있는 주요섭의 단편소설 「개밥」을 읽었다. “주인집 개의 밥을 아이에게 먹여야 하는 기막힌 처지를 그린 「개밥」을 보면 윤리적인 기준이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하층민에게 무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먹을 것을 놓고 서로 빼앗으려는 인간과 개의 사력을 다한 싸움은 인간이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빈궁에 있지만, 작가는 빈궁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한 극한상황으로까지 몰고가는가를 묘사하고 있을 뿐, 그 원인과 대안의 모색에는 인색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신경향파 문학의 한계로 연결되는 것이거니와 「개밥」은 주요섭의 제1기 소설이 직면한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명시감상] 7월의 시 (2021.07.01)

■ 빨래 / 윤동주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 쨍쨍한 칠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윤동주, 1917~1945) ■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시인, 1904~1944) ■ 7월 / 이오덕 앵두나무 밑에 모이던 아이들이 살구나무 그늘로 옮겨가면 누우렇던 보리들이 다 거둬지고 모내기도..

[소설읽기] '아네모네의 마담' 주요섭 (2021.06.30)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22) 《물레방아, 사랑 손님과 어머니, 백치 아다다》에 실려있는 주요섭의 단편소설『아네모네의 마담』을 읽었다. ■ 아네모네의 마담 / 주요섭 1 티룸 ‘아네모네’에 마담으로 있는 영숙이가 귀걸이를 두 귀에 끼고 카운터 뒤에 나타난 날, 아네모네 단골 손님들은 영숙이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한들한들 춤을 추는 그 자줏빛 귀걸이의 아름다움을 탄복하였다. 아니 그보다도 그 귀걸이가 가져온 영숙이 자신의 아름다움에 황홀하였다. “아, 고것이 귀걸이를 달구 나서니 아주 사람을 죽이네그랴.” 하고 한편 구석에서 차를 마시다 말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고, “어, 마담이 아주 귀걸이를 한층 더 꿰서 귀부인이 됐는걸, 허허허.” 하고 크게 웃는 사람도 있고 양주 두어 잔에 얼굴이 붉어진 신사..

[명시감상] '목계 장터' 신경림 (2021.06.30)

■ 목계 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시어 풀이 * 목계 나루:충주 부근 남한강변에서 가장 번화했던 나루장터 * 박가분:여자들의 화장품 * 방물장수:여자들에게 소용되는 물품을 파는 ..

[명시감상] 水墨정원 9 - 번짐 장석남 (2021.06.29)

■ 水墨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ㅡ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 2021.06.29

[명시감상] '결혼에 대하여',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칼릴 지브란 (2021.06.29)

■ 결혼에 대하여 /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You were born together, and together you shall be forevermore. You shall be together when the white wings of death scatter your days. Ay, you shall be together even in the silent memory of God. But let there be spaces in your togetherness, And let the winds of the heavens dance between you.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또한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삶을 흩어놓을 때에도 ..

[명시감상] '자작나무', '선우사',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2021.06.25)

■ 자작나무 (白樺) /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平安道) 땅이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ㅡ 『조광』 4권 3호 (1938) ■ 선우사(膳友辭) /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

[시와 수필] '논개', '봄비',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변영로 (2021.06.22)

■ 논개(論介) / 변영로(卞榮魯, 1897~1961) 거룩한 분노(忿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나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미(蛾眉): 누에나방의 모양처럼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 [출처] 1922년 《신생활》 4월호 ■ 「봄비」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최대봉의 문화읽기] '시집(詩集)의 탄생' 최대봉 (2021.06.21)

■ [최대봉의 문화읽기] 시집(詩集)의 탄생 / 최대봉(작가) ‘TV쇼 진품명품’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가 있다. 달포 전쯤이던가, 겉보기에도 낡은 오래된 작은 시집(詩集) 한 권이 그 방송에 나왔다.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가 1924년에 출판한 첫 시집 《조선(朝鮮)의 마음》이었다. 우리의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라는 시 「논개」가 수록된 시집이기도 하다. 수주(樹州) 변영로가 누구인가? 그의 저서 《명정 사십년》의 명정(酩酊)이 ‘술에 의해 정신 줄을 놓다’라는 뜻이니 술과 함께 한 그의 좌충우돌, 기상천외한 기행(奇行)들은 아무리 한다하는 술꾼이라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라 할 수 있었다. 백주 대낮에 술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