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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봉의 문화읽기] '시집(詩集)의 탄생' 최대봉 (2021.06.21)

푸레택 2021. 6. 21. 21:50

■ [최대봉의 문화읽기] 시집(詩集)의 탄생 / 최대봉(작가)

TV쇼 진품명품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가 있다. 달포 전쯤이던가, 겉보기에도 낡은 오래된 작은 시집(詩集) 한 권이 그 방송에 나왔다.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가 1924년에 출판한 첫 시집 《조선(朝鮮)의 마음》이었다.

우리의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라는 시 「논개」가 수록된 시집이기도 하다. 수주(樹州) 변영로가 누구인가?

그의 저서 《명정 사십년》의 명정(酩酊)이 ‘술에 의해 정신 줄을 놓다’라는 뜻이니 술과 함께 한 그의 좌충우돌, 기상천외한 기행(奇行)들은 아무리 한다하는 술꾼이라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라 할 수 있었다. 백주 대낮에 술에 취해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소를 타고 도심에 나타난 일화는 아직까지 회자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그러나 그는 서슬 푸른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마음》이라는 제목을 쓰고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의로운 기생 논개를 시로 쓸 만큼 기개 높은 민족시인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의 초판본이 TV쇼 진품명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 여기서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걸 빼먹고 넘어갈 수 없다. 전문가가 추정한 가치는 3,000만 원이었다.

이제까지 경매에 나온 우리나라 시집 중 최고가를 기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삽화에서 보듯 ‘꽃내달진’이라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제목을 쓴 김소월(1902~1934)의 《진달래꽃》이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김소월의 이 이별노래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가 누가 있으랴.

그의 시들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성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리고 있고 우리 시어(詩語)의 가장 높은 금자탑을 이루어 놓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1925년에 나온 그 《진달래꽃》 초판본의 경매가는 얼마였을까? 무려 1억3500만 원이었다. 그게 2016년의 일이니 지금쯤은 2억을 호가할 지도 모른다.

시집(詩集)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올해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집이 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921년 안서(岸曙) 김억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으니 그 제목이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라는 번역시집이었다. ‘고통과 번뇌의 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시집은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를 최초로 소개해 그 시절 우리나라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우리 문학사에 가장 의미 있는 시집들 중 하나라 할 것이다. 그 시집에 수록된 가장 유명한 시들 중 하나가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다.

‘가을 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가슴 속에 스며들어 쓸쓸하여라’ 1944년 6월 2차 대전의 정점을 찍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개시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에게 알리기 위해 영국의 BBC방송이 베를렌의 이 시를 방송한 것은 그 시절 프랑스인들이 가장 애송하던 시였기 때문이었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을이면 누구나 한 번쯤 읊조려봤을 구르몽의 시 이 우리에게 소개된 것도 이 시집을 통해서였다.

우리 근현대문학사에서의 ‘최초’라는 말에는 유감스럽게도 부끄럽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해(海)에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 최초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를 쓴 이인직, 최초의 현대시 「불놀이」의 주요한, 최초의 현대 소설 「무정」의 이광수.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무도한 일제의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우리 젊은이들을 징용으로 내몬 부끄러운 행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안서(岸曙) 김억도 그 저주의 굴레를 피해가지 못했다. 우리 근대문학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종군간호부의 노래」 등 일제 군부를 찬양하는 부끄러운 시들을 쓰고 6.25 때 월북해 생사가 묘연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사물에 명암이 있듯이 사람도 그럴 것이다.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당나라 기생 설도(薛濤)가 쓴 「춘망사(春望詞)」를 김억이 이렇게 번역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우리말의 가락과 정서를 이토록 눈부시게 구현한 시를 찾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오산중학교 교원 시절 소월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르쳐 시인의 길로 이끌었다. 우리 민족시의 가장 큰 자산 김소월이 그렇게 우리에게 왔다. 빛과 그림자의 시인 김억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지 꼭 100년이 되었다.

글=최대봉 작가

[출처] 영주시민신문 (2021.05.14)

■ 논개(論介)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거룩한 분노(忿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나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 흘러라

*아미(蛾眉): 누에나방의 모양처럼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

[출처] 《조선의 마음》 (이프리북스, 2013)

/ 2021.06.21(월) 편집 택


https://youtu.be/Tcc9lHOvRzk

https://youtu.be/xcFOZM0ou1U

https://youtu.be/Zc-I6TD4W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