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일락꽃 / 도종환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 처음 가는 길 /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 도종환
내가 힘들고 지칠 때는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늘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로부터
먼 데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다
나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
나를 위해 먼데서 전화를 해주는 사람
약이 될 만한 것을 찾아서 보내는 사람
찾아와 함께 걱정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내가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그들의 격려
그들의 화살 기도를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쓰러진 내 이마를 짚어주고
힘겨워하는 나를 부축해 주며
먼 길을 함께 가주는 사람들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은 나 혼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한 개의 과일이 결실을 이루기까지
비바람에 시달리는 날들도 많았지만
그 비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익어온 날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꽃 한송이도 지치고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그 하루하루가 쌓여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이다
사과나무도 밤나무도 그렇게 가을까지 온 것이다
과꽃도 들국화도 코스모스도 다 그렇게 꽃 핀 것이다
비바람과 햇빛이 그런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힘을 준 것들도 많은 것이다
■ 나리꽃 / 도종환
세월의 어느 물가에 나란히 앉아
나리꽃만 한나절 무심히 바라보았으면 싶습니다
흐르는 물에 머리 감아 바람에 말리고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나이가 들었으면 싶습니다
살다보면 어느 날 큰물 지는 날
서로 손을 잡고 견디다가도
목숨의 이파리 끝까지 물은 차올라
물줄기에 쓸려가는 날 있겠지요
사천삼천 꿈이 물줄기 두 발짝도 못 가서 손을 잃고
영영 헤어지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또다시 태어나는 세상의 남은 생애를
세월의 어느 물가에서 따로따로 그리워하며 살겠지요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목이 길어진 나리꽃 한 송이씩 되어
바위 틈에서고 잡풀 속에서도 살아가겠지요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 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을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 2021.06.20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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