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시와 수필] '논개', '봄비',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변영로 (2021.06.22)

푸레택 2021. 6. 22. 15:24

■ 논개(論介) / 변영로(卞榮魯, 1897~1961)

거룩한 분노(忿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나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미(蛾眉): 누에나방의 모양처럼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

[출처] 1922년 《신생활》 4월호

■ 「봄비」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어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사랑 앞에 자지러지누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출처] 신생활, 제2호 (1932년 3월)


■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 변영로

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 날 바카스의 후예들인지 유영(劉怜)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재*, 횡보* 3주선(酒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不酒客)이라 하더라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 문제인데, 주인이랍시는 나 역시 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였다.

허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 원, 그때 수삼 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3,4인이 해갈은 함즉하였으나 우리들 무리 4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와는 다르다 해도 하나의 악지혜(기실은 악은 없지만)를 안출하였다. 동네의 아무개 집 사동 하나를 불러다가 몇 자 적어 화동 납작집에 있는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은 고(故) 고하*였는데 편지 사연은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다. 좋은 기고를 하여 줄 터이니 50원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보내 놓고도 거절을 당하든지 하면 어쩌나 마음이 여간 조이지 않았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참으로 지리한 시간의 경과였다.

마침내 보냈던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 무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것 같이 한군데로 집중되었다. 직각도 직각이지만 봉투 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 급하게 뜯어보니 바라던 대로, 아니 소청대로의 50원, 우화(寓話)중의 업오리 금알 낳듯 하였다.

이제부터 이 50원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쓰느냐는 공론이었다. 그때만 해도 50원이면 거금이라 아무리 우리 넷이 술을 잘 먹는데도 선술집에 가서는 도저히 비진(費盡)시킬 수 없었던 반면에, 낮부터 요정에를 가서 서둘다가는 안심이 안 될 정도였다. 끝끝내 지혜(선악간에)의 공급자는 나로서 나는 야유를 제의하였다. 일기도 좋고 하니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가지고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뒤)로 가자 하니 일동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명륜동에 있는 통신 중학관(고 미상희 군이 경영하던)으로 가서 그곳 하인 어서방을 불러내어 이리저리하라. 만사를 유루(遺漏)없이 분부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하였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앉았는데 어서방은 술심부름, 안주 장만에 혼자서 바빴다. 술은 소주였는데 우선 한 말을 올려다 놓고 안주는 별 것 없이 남비에 고기를 끓였다. 참으로 그날에 한하여서는 쾌음, 호음하였다. 객담, 고담, 농담, 치담, 문학담을 순서 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잣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 이러한 복스런 시간이 길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셨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고금 무류의 대기록을 우리 4인으로 하여 만들게 할 천의랄까, 하여간 국면이 일변되는 사태가 의외에 발생하였다. 그때까지는 쪽빛같이 푸르고 맑던 하늘에 난데없는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돌더니, 그 구름장이 삽시간에 커지고 퍼져 온 하늘을 덮으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유연작운(油然作雲), 체연하우(滯然下雨) 바로 그대로였다.

처음에 우리는 비를 피하여 볼 생각도 하였지만 인가 하나 없는 한데이고, 비는 호세 있게 내리어 속수무책으로 살이 보일 지경으로 흠뻑 맞았다. 우리는 비록 쪼루루 비두루마기를 하였을망정 그때의 산중취우(山中驟雨)의 그 장경은 필설난기(筆舌難記)였다. 우리 4인은 불기이동(不期而同)으로 만세를 고참하였다.

그 끝에 공초 선지식(善知識)이 공초식 발언을 하였다. 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이었던 바,다름 아니라 우리의 옷을 모조리 찢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옷이란 워낙 대자연과 인간 두 사이의 이간지물(離間之物)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도 한 말이었다. 공초는 주저주저하는 나머지 3인에게 시범을 보여주듯이 먼저 옷을 찢어 버렸다. 남은 사람들도 천질이 그다지 비겁치는 아니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대취한 네 과한(稞漢)들이 광가난무(狂歌亂無)하였다. 서양에 Bacch-analian orgy란 말이 있으나 아무리 광조(狂躁)한 주연이라 해도 이에 비하여서는 불급(不及)이 원의(遠矣)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 아래 소나무 그루에 소 몇 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였던지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 우리는 소를 잡아타자는데 일치하였다. 옛날에 영척(甯戚)이나 소를 탔다고 하지만 그까짓 영척이란 놈이 다 무엇이냐. 그 따위 것도 소를 탔는데 우린들 못 탈 바 어디 있느냐는 것이 곧 논리이자 동시에 성세(聲勢)였다.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一絲不着:옷을 입지 않음)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몰(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긴)을 건너고 공자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 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壯圖-시중까지 오려던 일)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공초(空超) : 오상순
*성제(誠齋) : 이관구
*횡보(橫步) : 염상섭
*고하(古下) : 송진우

☆ 변영로(1897~1961)

시인·수필가. 호는 수주(樹州). 신시(新詩)의 선구자였고 수필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작품에 시집 《조선의 마음》, 수필집 《명정 40년》 등이 있다.

위의 수필은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간행된 변영로(卞榮魯)의 수필집 에 수록된 글로 변영로의 솔직한 심정과 풍자 해학 기지를 엿볼 수 있다. 책머리에는 박종화(朴鍾和)의 서(序)와 작자의 자서(自序)로 ‘서설(序說)이 있고 수록작품 72편을 4부로 나누어 실었다.

이 수필은 대주가(大酒家)로 불린 작자가 40년간 술에 취해서 살아온 무류실태기로서 풍자적이며 해학적이고 기지 넘치는 필치로 그 시대상을 고발하고 있다. 남들은 30∼40년 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대성질호(大聲疾呼)하는 판에 자신은 호리건곤(壺裏乾坤)에 부침(浮沈)한 것을 생각할 때 자괴자탄(自愧自嘆)을 금할 수 없다고 변영로는 자서(自序)에서 말하고 있다. 곧 그의 반생(半生)은 비극성을 띤 희극 일관으로 경쾌주탈(輕快酒脫)하게 저지른 범과가 기백기천으로 헤아릴 길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영로가 이렇게 술에 취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소설가 박종화는 세상 됨됨이가 옥 같은 수주(樹州: 변영로의 호)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아니치 못하게 한 것이 우리 겨레의 운명이었으며, 난초 같은 자질이 그릇 시대를 만났으니 주정하는 난초가 되지 않고는 못 배겨내었던 때문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명정기에 주정이 없다 하면 평자 자신이 숙취중(宿醉中)이란 말을 들을 것이다. 광태라고 부를 만한 실행(失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작폐(作弊)의 주정이 아니다. 더러 결정적 실수가 있었다 해도 웃을 수 있는 실수다.

경음(鯨飮, 고래같이 마심)하는 거인(巨人)의 실태(失態)라서 트로이의 영웅들이 총동원해서 이루는 전쟁기를 연상시킨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한 것처럼 웃을 수 있는 실태에 험구(險口,험담)를 늘어놓을 수 없다. 희극의 주인공이 늘 사랑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작폐가 없으면 깨끗한 주정이다. 거기다 웃음마저 곁들였으니 금상첨화의 술주정이다.

■ [수필] 변영로(卞榮魯)와 양주동(梁柱東) / 윤병로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수주 변영로 편」

언제였던가 시인이며 영문학자이기도 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표징 제막식이 경기도 부천시 수주의 고향 집에서 열렸다. 한국문인협회가 1995년부터 한국 문학을 빛낸 작가, 시인의 유적지에 표징을 설치해 후손에게 남기고자 ‘현대문학 표징사업을 전개해 왔는데 그 일환으로 표징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나더러 사회자가 수주 선생의 제자와 후배로서 추억담을 한마디하라고 해서 먼 옛날을 회상하며 수주선생을 추모한 바 있다.

그 유명한 시 「논개」를 비롯한 뛰어난 기교적 시와 신랄한 해학과 풍자의 수필로 독보적인 문인, 수주 변영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수주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이니까 어언 50년 가까운 아득한 옛 일이다. 선생의 ‘영문학사 강의를 선택했던 것도 실상은 선생의 명강의를 한 번쯤 들어보겠다는 호기심이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강의는 대개 오전 시간이었는데 항상 얼굴에는 주기(酒氣)로 홍조를 띄어 열변을 토했고, 그 특유한 모습과 해학적인 언변 등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성대입구에는 일취옥이란 교수들의 단골 목로집이 있었는데, 선생께서는 아침 출근길에 그곳에 들러 해장으로 한 대포를 기울이고 강의실에 들어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수주 선생은 ‘영문학사 책 한 권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면 교단에 서는 일도 없이 맨 앞 학생 책상 위에 털썩 주저앉아 그 특유의 언변으로 영문학사 원서를 줄줄 해독해 갔다. 그러면 우리 학생들은 선생님의 해석을 노트하기 바빴고 간간이 내뱉는 패러독스에 깜짝 깜짝 감탄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시간에 한 학생이 선생님께 당돌하게도 선생님, 그 대목의 해석은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습니까?하고 질문했다. 선생님은 대뜸 그 학생을 향해서 “너는 더도 말고 나만큼만 알면 돼!하고 큰소리로 면박을 주었다. 지금 내가 강의를 하면서 선생님과 꼭 같은 자세를 취했더라면 분명 ‘엉터리 교수라고 규탄 받았을 것이 아닌가. 수주 선생님은 대 시인이요, 무게 있는 석학이었기에 그 위풍에 압도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수주 선생은 1955년 내가 대학 3학년 때 뜻하지 않은 필화사건으로 성균관대학교를 물러나게 되었었다. 그 사연은 선생의 특유의 해학으로 쓴 칼럼 「불혹(不惑)과 부동심(不動心)」이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의 성토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성모욕(先聖侮辱) 사건으로 당시 문화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그 사건이 화근이 되어 성균관대학과 인연을 끊게 되었다. 수주선생은 1920년 문예지 동인이 된 후부터 40여 년 동안 시집 『조선의 마음』을 비롯, 『명정(酩酊) 40년』, 『수주 수상록』, 『수주 시문선』 등 명작을 남겼다. 특히 선생의 주호(酒豪)로서 면모를 생생히 담고 있는 수필집 『명정 40년』 (서울신문사, 1953년)은 화제작으로 많이 읽혔다.

1950년대 전후에 옛 명동극장 옆에 자리했던 주점 ‘은성은 위치도 좋았지만 안주와 술맛이 좋다는 평판도 받았는데 주모가 활달하고 너그러워 많은 문인과 언론인들이 성시를 이루었다. 이 집의 주인은 탤런트 최불암 씨의 어머니로 그 입심 좋은 주객들을 흔쾌히 접대해 주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은성에는 숱한 저명인사들이 단골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땅의 주호(酒豪)로 꼽히는 수주(樹州) 변영로와 무애(无涯) 양주동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수주는 ‘명정 40년의 관록을 과시하듯 이 집에 오후 3시 정각에 들어서자 작가 이봉구와 대작을 하면서 주도(酒道)를 가르쳤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4․19 이후, 가을 어느 날 수주는 수척한 얼굴로 은성에 나타났다. 이봉구는 「은성의 수주 변영로」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목병이 또 도지는 모양인데.
불치의 인후암(咽喉癌)이 또 재발되어 큰 일이라고 하면서도 술잔을 들었다.

“술은 금하셔야지요.
“까짓 거, 누가 지나 해 볼 테야. 마시는 날까지 마셔 보고서.

그러나 천하 주당 1급으로 꼽히는 수주도 그 해가 저물면서 술을 입에 대지 못했고 약병을 들고 ‘은성에 나타나서 멍하니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키었다고 한다.

스스로 술꾼 40년을 자괴자탄했던 문호, 수주 변영로 선생은 1961년 향년 64세에 지병으로 타계하셨다. 선생의 부음을 접하고 문우(文友) 정인섭씨는 수주를 애도하면서 “영국 문단에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가 있었고 또 버나드 쇼가 있었는데, 수주는 이 두 사람을 한데 합친 듯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다방을 순례하며 담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술을 좋아해도 거리에서 귀염 받는 신사였다라고 회고했다. 참으로 수주선생의 뛰어난 풍모를 여실히 대변한 게 아닐까.

글= 윤병로: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한국평론가협회장 역임

생시에 못 뵈올 님을 꿈에나 뵐가 해.. 독립 꿈꾸던 시인의 마을 / 박광수 불문학자·문화평론가

봄비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신생활’, 제2호(1932년 3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인천 계양구 방면으로 가다 보면, 부천 초입에서 도로명이 ‘오정큰길’로 바뀌며, 커다란 돌비석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이정표가 있는 고강지하차도 교차로가 바로 서울과 부천을 나누는 경계지점이다. 차들이 끊임없이 질주하는 8차선 대로 중간에, 마치 커다란 하천에 형성된 하중도(河中島)처럼, 2001년 변영로 시인의 40주기(周忌)를 기념해 조성한 공간이 있다. 변영로의 상징과도 같은 예의 그 중절모를 쓰고 넥타이를 단정히 맨 등신대 좌상이 있다. 책을 펼쳐 왼손에 들고 있지만, 시선은 멀리 서울 쪽을 바라보고 있다. 높다란 동상 받침대 아래에 있는 검은 돌에 시 ‘봄비’를 새긴 작은 시비는 앙증스럽다. 주변에는 아치형 조형물과 가족상, 거기에 벤치도 몇 개 있어서 작은 공원 같다. 밤에 조명이 켜지면 근사하다고 들었지만, 그보다는 배경 삼기에는 노을 무렵이 더 나을 듯하다. 하지만 끊임없는 차 소리와 김포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이 너무 낮게 머리 위로 날아가는 탓에 이따금 깜짝 놀란다. 오랜 시간 머무를 쉼터는 못 된다.

“부천의 시인”은 사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변영로는 1898년 5월 9일(음력)에 경성부 맹현(孟峴, 맹고개)에서 출생했다. 맹현은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이다. 1961년 3월 14일 종로구 신교동에서 생을 마쳤다. 그 마지막 자택도 이제는 3층 빌라 건물이 들어섰고, 그저 아래층 작은 담배가게 간판 위에 붙여놓은 작은 표지판만이 시인을 추억하고 있다(종로구 자하문로23길 3, 신교동). 시인의 모교, 재동초교 교문 옆에 작은 표지석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변영로의 호 ‘수주(樹州)’는 고려 때 부천을 부르던 지명이다. 시인은 선대들이 대대로 살아온 부천의 ‘고리울 강상골’을 고향 마을로 삼았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신혼살림을 차리고 맏이를 얻은 곳도 이곳이다. 서울에서 여러 차례 거주지를 옮겼지만, 그의 주소는 언제나 고향집이었다. 일제 말기에 붓을 꺾고 귀향했다가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곳이다. 변영로는 죽어서 고향 마을에 돌아와 묻혔으니, 마지막 귀의처다.

시인의 고향집 안내 푯돌(오정구 고강동 313번지)을 먼저 찾으면 그 왼편으로 밀양 변씨 공장공파 선산이 바로 보인다. 아버지 변정상(卞鼎相)의 묘 아래, 밀양삼변(密陽三卞) 또는 부천삼변(富川三卞)으로 불리던 변영만(卞榮晩), 영태(榮泰), 영로(榮魯) 형제의 묘가 나란히 있다. 아래쪽으로 다시 한 단을 더 만들어, 산강(山康)의 ‘몽중찬자(夢中粲者)’ 시비와 일석(逸石)의 공적비, 수주의 시비가 각각 줄을 맞춰 배열됐다. 작년에 ‘한국 삼변(三卞) 선생 충혼비’를 조성하며, 조경 공사를 크게 했다. ‘생시에 못 뵈올 님을’ 시비는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 위치가 많이 옮겨졌고 못 보던 비석이 많이 들어섰다. 여기에 형제들 유택의 좌우에 있는 여러 묘비와 그 건립비까지 합하면, 그 숫자만 해도 십여 개다. 가운데 국기 게양대까지 있으니 작은 비석 공원이라 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 추모식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길게 걸려 있다. 우거진 잡풀들을 헤집으며 애써 길을 만들며 올라왔던 예전 기억을 구태여 떠올릴 필요는 없지만, 너무 깔끔하게 꾸며진 주변 전경은 못내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다.

변영로는 중앙 기독교청년회 학교 영어반의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졸업하고, 1918년 6월 ‘청춘’지(誌)에 영시(英詩) ‘코스모스 Cosmos’를 발표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과 외국어에 대한 남다른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다. 몇 달 뒤, 1919년 3·1운동 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기독교청년회관(YMCA)의 구석진 방에서 밤을 새워 가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 독립선언의 취지와 우리 겨레의 울분과 상황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해외로 발송하는 위험한 일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야트막한 뒤편 언덕의 오솔길이 부천 둘레길(4코스)로 이어지는 탓에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제법 많다. 동네 어르신들이 무덤가에서 쑥을 캐신다. 아직 여린 잎이라 뭐 먹을 것이 있을까 해 물어보니, 맏물로 돋아나는 싹이라 아직 억세지 않고 향도 그만이란다. 산책 삼아 나온 김에 잠깐 땄다고 하지만, 그 양이 벌써 넉넉해 저녁 밥상에서 입맛 다시기에는 충분할 듯하다.

수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8년 이전 작은 묘비 옆에 새로 조성한 기념비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뒷면에 쓰인 글을 보고는 순간 움찔했다. 변영로에 대한 흔한 편견과 무지, 못된 선입견에 대한 벼락같은 일갈(一喝). “사람들이여! 수주가 누구더냐/(…) / 얄팍한 사람들아/ 누가 수주를 주정뱅이라고 했더나/ 어서 여기와 무릎 꿇라.” 옳은 말이다. 삼거리 ‘수주 슈퍼마켓’에서 문득 생각나 술 한 병 사서 오길 잘했다. 옷매무새 가다듬고 한 잔 가득 올리고 예를 표한다.

말 나온 김에 시인의 일화를 하나 더하자. 이른바 ‘조선의 건각(健脚)’ 사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폐간당하고 관련된 언론인들이 일경에 한참 고초를 당하고 있는 와중에, 그 자매지인 월간 ‘신가정’의 주간으로 있던 변영로는 이번에는 손기정의 사진 속 일장기를 지우는 대신 아예 상반신을 잘라내고 두 다리만을 확대해 ‘세계를 제압한 두 다리’란 제목을 붙여 잡지 표지로 삼았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속편인 셈이다. 당장 일본 순사들이 달려와 일장기가 있는 사진 윗부분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사진에 다행히 일장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변영로가 사표를 내야 했고, 그 선에서 끝나는 듯했다. 일제의 보복은 집요했다. 이듬해, ‘흥업구락부’ 사건과 연루시켜 변영로를 결국 검거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그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고충을 겪었지만, 다행히 107일 만에 풀려난다. 출옥하자마자 달려간 곳은 망해가던 술집, 수주의 ‘석방주(釋放酒)’는 곧 그 술집과의 ‘이별주(離別酒)’였다.

‘수주 변영로 선생 기념비’는 시인이 타계한 다음 해인 1962년에 세웠으니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ㅂ’ 모양 하얀 바탕돌 사이에, 글자를 음각으로 새긴 까만 오석(烏石)을 끼워 넣은 형태다. 앞면에는 ‘생시에 못 뵈올 님을’의 전반부가, 뒷면에는 일석(一石) 이희승이 지은 글이 있다. 일중(一中) 김충현의 고운 국한문 혼용 서체는 언제 보아도 한눈에 반할 만큼 수려하고, 가만 지켜볼수록 멋스럽다. “생시에 못 뵈올 님을 꿈에나 뵐가 해/ 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 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 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이 시는 1924년 1월 동인지 ‘폐허이후(廢墟以後)’에 처음 발표했지만, 같은 해 8월 22일에 발간한 첫 번째 시집 ‘조선의 마음’에 다시 수록했다.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과 그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한 고운 시라고 해석할 수 없는 이유다. “아,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아볼까/ 조선의 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서(序) 대신에’). 한용운의 ‘님의 침묵(沈默)’에 나타나는 ‘님’이 지향하는 개념과 서로 통한다. 다만, 만해(萬海)의 ‘님’은 복합적이고 다양하지만, 수주의 ‘님’은 보다 직접적이지만 ‘상징적이다’. 변영로의 ‘생시에 못 뵈올 님’은 찾아야 할 ‘조선의 마음’이며,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민족의식’이다.

변영로의 ‘논개’ 시비는 논개(論介)와 관련된 장소에는 어김없이 서 있다. 촉석루 아래 남강이 흐르는 진주성 입구와 전북 장수의 논개 사당인 의암사(義巖祠)에 ‘논개’의 전문을 수록한 시비가 있다. 이 두 개의 비가 세워진 1991년에는 어쩐 일인지 제주 애월읍 조각공원에도 ‘논개’ 시비가 들어섰다. 시 ‘논개’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수주의 다른 시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리고는 3번 반복되는 후렴구가 깊이 남는다.

부천의 첫 번째 ‘논개’ 시비는 뜻밖의 장소에 있다. 수주로를 따라 백여 미터쯤 내려가면,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무신, 변종인(卞宗仁)의 유적지가 나온다(부천 향토유적 1호). 그의 묘소, ‘공장공신도비(恭莊公神道碑)’와 비각(碑閣) 등이 있다. 1989년에 이 ‘유적지정석’ 뒤편에 ‘논개’ 시를 새겨 시비로 삼았다. 변영로가 공장공의 직계후손이라고 해도, 여기는 ‘논개’ 시비를 세울 만한 장소가 아니다. 그런 탓인지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시비의 모양새도 볼품이 없어, 애써 이 외진 곳까지 일부러 다시 찾을 일은 없을 듯하다. 처음 세웠다는 가치만 남았다.

부천에서 ‘제대로 만든’ 변영로의 ‘논개’ 시비는 시내에, 그것도 부천시청 바로 뒤 중앙공원에서 찾을 수 있다. 1996년이 거의 저물던 12월 30일에 간신히 완공했다. 시비가 세워진 지도 이미 이십 년이 지났지만, 잘 관리한 덕분에 세월의 흔적도 마모된 곳도 거의 없다. 글씨도 어제 쓴 듯 선명하다. 시비는 크기도 적당해 안정감이 있고, 시가 새겨진 하얀 빗돌과 검은 주춧돌도 제법 잘 어울린다. 첫눈에 반할 만하다.

부천시는 2014년부터 시내를 흐르는 심곡천의 일부 구간을 생태하천(심곡 시민의 강)으로 복원하며, 그 첫 번째 인도교에 시인의 이름을 붙였다. 2017년에는 ‘변영로교’ 앞에 작은 ‘봄비 공원’을 조성했다. 그런데 낮은 돌담 위에 세운 공원 이름표, 그 담에 기대 있는 시인 소개판과 ‘봄비’ 시 패널 너머가 하필이면 공원 화장실의 외벽이다. 옆에도 넓은 공간이 있는데 말이다, 세심한 끝마무리가 못내 아쉽다.

마지막으로 시 패널의 ‘봄비’ 전문을 가만히 읊어본다.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를 입가에 올리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유명한 시구(詩句)로 시작되는 ‘낙화(落花)’를 쓴 시인, 무엇보다 “논개의 고장” 진주 출신인, 이형기는 시 ‘논개’를 해설하며 변영로의 오류를 지적했다. 후렴구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에서 ‘보다(더)’에 주목해 색 표현과 그 비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강낭콩 꽃은 희거나 자줏빛 또는 연분홍이며 양귀비꽃도 역시나 ‘마냥’ 붉은빛은 없다는 말이다. 그 지적은 적절하다. 하지만 구태여 식물도감(植物圖鑑)을 펼쳐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변영로의 시 ‘논개’에서라면, 진주 남강의 물결은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르러야 하고 논개의 의로운 마음은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어야 한다. 그저 대가(大家)의 ‘의도적 오류’라고, 그것도 아니면 시를 해석하면서 끝내 해결 못 할 때 함부로덤부로 붙이는 ‘시적 자유 또는 허용’이라고 하자. 그나저나 “은(銀)실 같은 봄비”에 젖은 비둘기 발목은 과연 붉어질까.

글·사진=박광수 불문학자·문화평론가

[출처] 문화일보 (2019.03.29)

/ 2021.06.22(화)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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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청렴한 공직자의 사표(師表), 변영태(卞榮泰) 외무부 장관.. 변영만·영태·영로의 후손들 (

■ 변영태(卞榮泰, 1892~1969)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영문학자. 재동소학교를 졸업하고 교동고등소학교(校洞高等小學校)를 거쳐 계산보통학교(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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