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뿌리다 / 이동훈
민들레 씨나 졸참나무 씨나
우리 동네 김 씨나
씨의 족속이긴 마찬가지인데
민들레 씨는 새가 먹고
졸참나무 씨는 다람쥐가 먹고
동네 김 씨는 혼자 먹는다
먹고 싼 것이 또 씨가 되어
씨로 열매 맺고
씨로 나누어 먹고
씨로 돌아오는 것이니
씨 뿌리는 일은 과연 생산적이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몹쓸 짓은
씨 말리는 일이다
우리 동네 김 씨는
민들레 씨보다 부지런해 보이고
졸참나무 씨보다 힘세 보이지만
땅만 파는 농부라는 이유로
쉰이 다 되도록 총각이다
오늘도 씨불씨불하는데
씨 뿌리지 못해
말로만 씨부리는 탓이다
ㅡ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 (문학의 전당, 2014) 中에서
◇ 이동훈 시인
1970년 경북 봉화 출생
2009년 월간 《우리시》 등단
시집 / 『엉덩이에 대한 명상』
[감상과 해설]
1
바야흐로 파종의 계절이다. 씨를 뿌려서 종족을 보존하고 이어나가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위 시는 재미있게 느껴지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웃픈 현실의 이야기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생명체다.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를 생산하고 그런 울타리를 일구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고귀한 숙명인지도 모른다. 혼자 살아가는 것도 물론 개인의 선택이며 존중해야 할 삶이지만 말이다.
점점 더 1인가구가 늘어나는 시대이다. 위 시에 등장하는 동네 김 씨 같은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안타까와하는 화자의 마음이 훈훈하게 읽혀진다. 올봄엔 우리나라에 화합과 상생의 씨앗들이 뿌려져서 꽃들이 피어나고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면 좋겠다. 혼란 중에 탄식하던 입들일랑 이젠 닫고 봄이 오는 저 길로 평화의 씨 뿌리러 나가보자. / 최한나
2
봄이 온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씨” 뿌릴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모든 기운이 새롭게 일어나는 때, 어쩌면 우리는 그 때를 위하여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시는 쉽게 읽히는 듯하면서도, 읽고 난 후 오래 뒤척이게 하는 독특한 비극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쓰기 위해 시인은 민들레가 지나온 몇 번의 계절을 읽어 들였고, 졸참나무의 몇 계절을 묵묵히 눈으로 썼을 것이다.
또한 사내의 인생을 압축하여 오래 묵혀둔 터였다. 그 무엇 하나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는 시의 “씨”들이다. 일상에서 시를 길어 올리는 일이나 일상에서 내가 시가 되는 일은, 쉬운 듯 보이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 또는 사내의 생을 살피기 위해 시인은 대상을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대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고 농사의 시작인 셈이다.
농사의 시작은 씨를 잘 뿌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타고난(?) 재주가 있음에도, 정작 자신의 씨는 뿌리지 못하는 사내가 있다. 그러나 쉬운 듯 보이는 그 일이 지금도 어느 밭에서는 무수히 피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씨의 족속” 가운데 가장 상위에 있는 나와 당신이 과연, 민들레보다 졸참나무보다 부지런하고 힘이 셀까. 그간 뿌려놓은 “씨”로 또 다른 당신이 가뭄으로 말라가며, 상처받고 있지는 않은가.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그야말로 잘 뿌린 파종(播種)이겠다. / 정훈교 (시인)
●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 추천 글
이동훈의 시는 온유하다. 시상의 전개나 마무리에 있어 과장된 제스처나 억지스런 꾸밈이 보이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제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 사람이나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시가 아픔을 말할 때에도 나에게는 그 아픔까지도 부드럽게 읽혀진다.
이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현실에 대한 견고한 사유와 낭만적 상상력의 조화에서 온다. 존재론적인 결핍은 그의 상상력의 출발점이지만 그는 결코 비탄과 절망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중심에서 소외된 자들을 등장시켜 현실의 모순과 부정을 이야기할 때에도 그의 시선은 관조적이며 어조는 차분하면서도 해학적이다.
그의 시는 가난하고 혼돈스러운 현실의 바탕에서 피는 꽃이다. 이편과 저편을 두루 통섭하면서 피어나는 화엄의 꽃 한 송이! 그 향기는 참으로 맑고 그윽하다. 나는 이동훈의 시를 세계의 보편적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문주의자의 수행의 기록으로 읽는다.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해 편벽되지 않은 그의 사유는 성숙하고 깊다. 내가 이동훈 시인의 행보에 조심스럽게 동참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신현락 (시인)
'[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감상] 그리움의 시.. '강가에서' 이형기, '그리운 이름' 박우복, '그리움 하나 있네', 정유찬 '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2021.07.04) (0) | 2021.07.04 |
---|---|
[명시감상]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2021.07.04) (0) | 2021.07.04 |
[소설읽기] '개밥' 주요섭 (2021.07.02) (0) | 2021.07.02 |
[명시감상] 7월의 시 (2021.07.01) (0) | 2021.07.01 |
[소설읽기] '아네모네의 마담' 주요섭 (2021.06.30) (0) | 2021.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