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그리운 서귀포' 노향림 (2021.08.8)

■ 그리운 서귀포 1 / 노향림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마른 갯벌엔 눈 감은 게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ㅡ 노향림의 ‘그리운 서귀포1’ 전문 [감상] 노향림 시인의 시집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에서 그리운 서귀포 연작을 선보였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강렬한 그리움으로 들어 있는데 화가 이중섭의 불우한 생애..

[명시감상] '여름' 임영준, '여름방학' 나태주, '사랑' 안도현 (2021.07.30)

■ 여름 / 임영준 ​ 작열하는 태양이 축복으로 느껴진다면 만끽할 수 있다 ​ 세찬 장대비 속 환희를 안다면 누릴 자격이 있다 ​ 노출이 자랑스럽고 자연에 당당하다면 깊게 빠진 것이다 ​ 풀밭에 누워 별들과 어우러질 수 있다면 즐길 줄 아는 청춘이다 ■ 여름방학 / 나태주 여름방학 때 문득 찾아간 시골 초등학교 햇볕 따가운 운동장에 사람 그림자 없고 일직하는 여선생님의 풍금 소리 미루나무 이파리 되어 찰찰찰 하늘 오른다 ■ 사랑 /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2021.07.30 편집 택

[명시감상] '이름 부르는 일' 박남준 (2021.07.30)

■ 이름 부르는 일 / 박남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감상] 이름을 불러보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단서를 살짝 흘려놓았다. 얼굴을 떠올리니 초저녁 분꽃 향내가 밀려온다지 않는가. 분꽃은 나팔꽃같이 생겼는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이 핀다. 폴란드 전설에는 남장여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할 수 없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칼을 꽂았는데 거기서 분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아무리 남자처럼 꾸며놓았어도 마음 속에 깃든 여인의 수줍음과 서러움은 감출 수 없었다. 천상 여자라는 그 꽃. 분꽃은 화장 분(粉)과 통하니 분꽃 향내에는 어쩔 수 없이 초저녁에 문을 열고 ..

[명사수필] '사병월급으로 돌아보는 나의 군복무'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2021.07.29)

■ 사병월급으로 돌아보는 나의 군복무 /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 저 군대생활 할 적인 1976~7년 즈음에는 일병 상병 월급이 2천~3천원 정도였는데 요사이에는 병장 60만, 상병 54만, 일병 49만 여원씩을 받는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작대기 하나’ 이등병도 45만여 원을 받는다고 하지요. 70년대 후반으로 가는 즈음에 2~3 천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도 별로 가치가 없어서 그 사병월급을 타가지고 병영매점에 가서 ‘초전박살 생과자’를 두어 개 사먹고 과자 두어 봉지를 사면 그것으로 끝이었는데.. 이제는 사병 월급이 그렇게 인상되었다고 하니 요새 50~60만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용도가 매우 많고 규모도 매우 큰돈(!)이라는 생각인데 제가 가난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제 나이 또래..

[명시감상] '강아지풀', '가을 저녁에', '갈대', '산으로', '소백산에서' 성민희 (2021.07.27)

?? 강아지풀 / 성민희 오요요 오요요요 부르면 꼬리치며 내게로 달려올 듯하다 바람의 무심한 장난에도 힘없이 흔들리지만 동네 아이들 널 함부로 꺾고 마구잡아채 가지만 어느 날 비 개인 강둑에 수천 개의 꼬리로 푸들푸들 일어서는 강아지풀이여 사람을 좋아하는 늘 사람 편인 너는 잠든 누이의 콧속에 몰래 닿으려고 누군가의 목덜미를 살짝 간질이려고 오늘도 바람에 너울대는구나 ?? 두물머리에서 / 성민희 두물머리의 물처럼 흘렀으면 한다 비 오고 난 후의 넉넉한 물길처럼 자신을 넓히면서 잔잔히 흘렀으면 한다 원래 물은 두 줄기인데 어디서 아우러져 하나가 되었는지 서두르며 흐르던 물살이 두물머리에서는 왜 유유히 흐르는지 여유로우면서도 살갑게 그렇게 흘렀으면 한다 두물머리의 물처럼 흘렀으면 한다 ?? 꽃을 보며 / 성..

[수필읽기] 김점선 그림, 최인호의 수필집 '꽃밭'.. 정훈희 조관우의 '꽃밭에서' (2021.07.27)

오늘은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 최인호의 수필과 단상을 모아 엮은 에세이집 《꽃밭》(2007, 김점선 그림, 최인호 글)을 읽었다. △ 최인호(崔仁浩, 1945~2013) 생애 1945.10.17~2013.9.25 출생 서울특별시 1967년 단편 ‘견습 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타인의 방’으로 현대 문학상, ‘깊고 푸른 밤’으로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진행된 산업화와 관련되어 도시화 과정이 지닌 문제점을 예리하게 반영하면서 신선한 감수성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작품집으로 《불새》, 《별들의 고향》, 《내 마음의 풍차》, 《머저리 클럽》 등이 있다. 저자는 책머리에 ​유생 최한경이 지은 아름다운 연시 중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란 구..

[명시감상] '소나기' 정세훈, '집' 이삭빛 (2021.07.22)

■ 소나기 / 정세훈 소나기 한 차례 몰고 간 뒤에 옥수수 한 뼘쯤씩 자라고 있을까 옥수수대 씹어 단물 빨던 나 잡초처럼 커 온 내 고향 월계리 사모님이 된 소꿉친구 여자아이 내 등에 엎히어 수줍이 건너던 홍수 난 시냇물은 옥수수밭 지나 산모퉁이에서 아직도 여전히 흐르고 있을까 ■ 집 / 이삭빛 이제는 무조건 내 편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자로 재듯 따지는 합리적인 사람보다 원래 가슴이 따뜻해서 만날수록 더워지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잘난 사람보다 진실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너무 똑똑해 충고를 잘하는 사람보다 마음을 먼저 다독여주는 촉촉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일등이 아니어도 최고로 살아가는 사람 바다를 다 가진 사람보다 강물 한 줄기로 흐르는 풍경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삶의 테두리에 매여 독선적인 양심으..

[명시감상] '군인을 위한 노래' 문정희 (2021.07.22)

■ 군인을 위한 노래 / 문정희 당신들은 모르실 거예요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 이땅의 젊은 남자들은 누구나 군사분계선으로 가서 목숨을 거기 내놓고 한 시절 형제라고 부르는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절박하게 고통과 그리움을 배운답니다 그래서 이땅의 여자들은 소녀 때는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쓰고 처녀 때는 군대로 면회를 간답니다 그 시차 속에 가끔 사랑이 엇갈리는 일도 있어 어느 중년의 오후 다시 돌아설 수 없는 길목에서 군복 벗은 그를 우연히 만나 서로 어쩔 줄 몰라하며 속으로 조금 울기도 한답니다 서로의 생 속에 군사분계선보다 더 녹슨 어떤 선을 발견하고 슬퍼한답니다 당신들은 모르실 거예요 이 땅의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 ㅡ 시집 《양귀비꽃 ..

[명시감상] '식물도감' 송태한, '전쟁광 보호구역' 반칠환​,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2021.07.21)

■ 식물도감 / 송태한 빼곡한 책시렁에 갇혀있던 큼직한 책을 펼쳐 들면 불쑥 숨어있던 꿀벌이 앵앵거린다 책갈피 잎사귀 틈에서 살며시 모시범나비 날개를 편다 범부채 벌개미취 노루오줌 광대수염 가슴에 이름표 단 유치원생들처럼 앙증맞은 꽃들이 줄지어 얼굴 내밀고 산등성이 구름 몰려가듯 계절이 성큼 건너간다 상수리나무 타고 내려온 다람쥐가 총총걸음으로 책장을 질러간다 식물도감 마지막 쪽 제철 만난 수목원 귀퉁이엔 수줍은 뱀딸기처럼 어느 틈에 꿈꾸듯 나도 기대앉아 있다 [감상] 빼곡한 책시렁에 갇혀있던 식물도감 안에는 채집한 모든 식물이 살고 있다. “큼직한 책을 펼쳐 들면 불쑥/ 숨어있던 꿀벌이 앵앵거린다/ 책갈피 잎사귀 틈에서 살며시/ 모시범나비 날개를 편다”에서 만난 범부채, 벌개미취, 노루오줌, 광대수염…..

[명시감상] '이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 (2021.07.21)

■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랜터 윌슨 스미스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로 하여금 네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네게 미소 짓고 하루하루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식하지 않도록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너의 진실한 노력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네게 가져와 웃음을 선사할 때면 인생에서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