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고향의 그림자' 정채균 (2021.08.21)

■ 고향의 그림자 / 정채균 집성촌에 아늑히 펼쳐진 고을 산들바람 문안에 솟을대문 열리고 댓돌 위 고무신 자리 지키니 앞마당 라일락 향기 가득하여 막걸리에 육자배기 읊던 어르신 부채질하며 낮잠에 빠져든다 우물가 팽나무 나이테 굵어지니 고구마로 끼니 대신하던 자식은 버거운 타향살이 흰머리 늘었는데 빛바랜 흑백사진 걸린 대청마루 늙은 고양이 낙엽과 술래잡기하고 주인 잃은 장구는 홀로 눈물겹다. * 육자(六字)배기 : 잡가의 하나. 곡조가 활발하고, 진양조장단이며 남도 지방에서 널리 불려짐

[명시감상] '어머니' 박구하, '옛 벗을 그리며 - 지훈에게' 박남수, '소주병' 공광규 (2021.08.19)

■ 어머니 / 박구하 (1946~2008) 만약에 나에게도 다음 생이 있다면 한 번만 한 번만 더 당신 자식 되고 싶지만 어머니 또 힘들게 할까 봐 바랄 수가 없어라 ㅡ 유고 시집 ‘햇빛이 그리울수록’ [감상]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제는 어린이날이었고, 모레는 어버이날이다. 세상에 가정처럼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모든 사랑의 원천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다. 시인은 만약에 다음 생이 있다면 한 번만 더 당신의 자식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또 힘들게 할까 봐 바랄 수가 없다고 한다. 세상에 많은 사모곡(思母曲)을 봐 왔지만 이렇게 간절한 시는 처음 보았다.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금융업계에 종사하던 박구하가 시조단에 등장한 것은 쉰세 살 때였으니 늦깎이였다. 그러나 그는 한국정..

[명시감상] '그 사람' 허홍구,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기철,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손택수 (2021.08.18)

■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 손택수 골목 담벼락 아래 어제 못 본 냉이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꽃이 핀 걸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애써 피었는데 섭섭하지 않을까 냉이 꽃 때문에 저 무뚝뚝한 담벼락도 조금은 향긋해져서 나비가 날아올 것 같고, 나비 따라 벌도 붕붕거릴 것 같은데 탐험가들이 꼭 이런 마음이겠지 새로 발견한 풍경 앞에서 절로 가슴이 뛰겠지 오늘은 꽃이 나를 탐험가로 만들어주어서 여기가 나의 신대륙, 꿈에만 그린 오지 매일같이 지나치던 골목이 처음 가는 길처럼 두근거린다 저 째그만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ㅡ 시집 《나의 첫 소년》 (창비교육, 2017)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기철 내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

[명시감상] '늦팔월의 아침' 김영남 (2021.08.17)

■ 늦팔월의 아침 / 김영남 덥다고 너무 덥다고 저리 가라고 밀어 보내지 않아도 머물고 떠날 때를 알고있는 여름은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잠깐 머물다 금새 떠날 것을 알면서도 호들갑을 떨며 아우성을 치던 우리는 언제 그랬냐고 정색을 하며 가을을 반기겠지 짧디 짧은 가을 정취를 느끼기도 전에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마치 가을이 영원히 있어 줄 것처럼 칭찬하다가 언제 떠났는지도 모르고 어느샌가 입김 호호 불면서 또다시 추위를 나무라며 문지방 너머 목 길게 빼고 봄이 오기를 마냥 기다릴 거다 그러면서 나이만 먹는다고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투덜거려도 보고 용기 없어 하지 못했던 것에 미련도 되씹어 보며 커다란 나이테 하나를 또 끙끙 둘러메고 앉아 문밖 건너 진달래 붉은 향기 가슴에 밀려들면..

[김주대의 방방곡곡 삶] '소망슈퍼 할머니' 김주대 시인 (2021.08.15)

■ 소망슈퍼 할머니 / 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낮에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재미있는 사진 한 장을 보게 된다. 경기도 김포 월곶면에서 찍은 사진인데 ‘소망슈퍼’라는 가게의 간판이 따스하다. 할아버지 한 분이 가게 앞에서 자전거를 손보고 있다. 가게 간판에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그려져 있다. 둘 다 복코에 도톰한 입술, 굵은 눈망울이 남매처럼 닮았다. 자전거 손보는 할아버지의 손자 손녀일까, 아니면 할아버지 젊었을 적 어린 자녀분들일까? 얼마나 아이들을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간판으로 삼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큰 기대 없이 사진 속에 보이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저어… 거기 혹시 소망슈퍼인가요?” “네, 그런데요. 소망슈퍼예요.” 서울말과 비슷한 경기도 사투리의 할머니 목소리가 들..

[소설읽기] '화수분' 전영택 (2021.08.12)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4)에 실려있는 전영택의 단편소설 「화수분」을 읽었다. ■ 화수분 / 전영택(田榮澤) 1 첫겨울 추운 밤은 고요히 깊어 간다. 뒷뜰 창 바깥에 지나가는 사람 소리도 끊어지고, 이따금 찬바람 부는 소리가 ‘휙-우수수’ 하고 바깥의 춥고 쓸쓸한 것을 알리면서 사람을 위협하는 듯하다. “만주노 호야 호오야.” 길게 그리고도 힘없이 외치는 소리가 보지 않아도 추워서 수그리고 웅크리고 가는 듯한 사람이 몹시 처량하고 가엾어 보인다. 어린애들은 모두 잠들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눈에 졸음이 잔뜩 몰려서 입으로만 소리를 내어 글을 읽는다. 나는 누워서 손만 내놓아 신문을 들고 소설을 보고, 아내는 이불을 들쓰고 어린애 저고리를 짓고 있다. “누가 우나?” 일하던 아내가 말하였다.ㆍ “아니야요...

[소설읽기] '돌다리' 이태준 (2021.08.12)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20) 이태준의 《해방전후》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돌다리」를 읽었다. ■ 돌다리 / 이태준 정거장에서 샘말 십 리 길을 내려오노면 반이 될락말락한 데서부터 샘말 동네보다는 그 건너편 산기슭에 놓인 공동묘지가 먼저 눈에 뜨인다. 창섭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까지 바라보았다. 봄에 올 때 보면, 진달래가 불붙듯 피어 올라가는 야산이다. 지금은 단풍철도 지나고 누르테테한 가닥나무(떡갈나무)들만 묘지를 둘러, 듣지 않아도 적막한 버스럭 소리만 울릴 것 같았다. 어느 것이라고 집어 낼 수는 없어도, 창옥의 무덤이 어디쯤이라고는 짐작이 된다. 창섭은 마음으로 ‘창옥아’ 불러보며 묵례를 보냈다. 다만 오뉘뿐으로 나이가 훨씬 떨어진 누이였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기가 마침 방학으로 와 있던 ..

[명시감상] '9월' 오세영, '9월' 반기룡, '9월의 시' 문병란 (2021.08.09)

■ 9월 / 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코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코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 9월 / 반기룡 오동나무 뻔질나게 포옹하던 매미도 갔다 윙윙거리던 모기도 목청이 낮아졌고 곰팡이 꽃도 흔적이 드물다 어느새 반소매가 긴 팔 셔츠로 둔갑했고 샤워장에도 온수가 그리워지는 때가 되었다 ..

[명시감상] '먼 길' 목필균, '편지2 - 이중섭 화가께' 신달자 (2021.08.09)

■ 먼 길 / 목필균 내가 갈 길 이리 멀 줄 몰랐네 길마다 매복된 아픔이 있어 옹이진 상처로도 가야할 길 가는 길이 어떨지는 물을 수도 없고, 답하지도 않는 녹록지 않는 세상살이 누구나 아득히 먼 길 가네 낯설게 만나는 풍경들 큰 길 벗어나 오솔길도 걷고 물길이 있어 다리 건너고 먼 길 가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때로는 낯설게 만나서 때로는 잡았던 손 놓고 눈물 흘리네 그리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미소 짓기도 하며 그렇게 간다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돌아설 수 없는 길 가네 ■ 편지2 - 이중섭 화가께 / 신달자 가슴에는 천도복숭아 엉덩이에는 사과가 익어 가는 내 아이는 지금 향내로 가득합니다 곧 연둣빛 싹도 살며시 돋고 계집아이 수줍음도 돋아나겠지만 내 아이는 더 자라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뛰어..

[한시감상] 銷暑(소서) 白居易(백거이) (2021.08.08)

■ 銷暑(소서) / 白居易(백거이) 何以消煩暑 端居一院中 (하이소번서 단거일원중) 眼前無長物 窓下有淸風 (안전무장물 창하유청풍) 熱散由心靜 凉生爲室空 (열산유심정 량생위실공) 此時身自得 難更與人同 (차시신자득 난갱여인동) ● 더위 삭이기 / 백거이(772~846) 찌는 더위 어찌 삭일까 집안에 단정히 있게 번잡한 것 다 없애니 창 아래 시원한 바람 마음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빈 방이라 서늘해져 이는 스스로 느낀 것 남과 함께 하긴 어렵지 ● 더위 피하기 / 백거이 삼복 더위 어찌 피할까 방안에 잠잠하게 있으면 되지 눈 앞에 번잡한 것 다 치우니 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열기 흩어지고 마음 고요하니 방안은 자연히 서늘한 기운 이는 스스로 느껴야 하는 일 옆에서 봐도 모르는 일이라오 ● 더위를 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