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시 읽어주는 남자] '마지막 힘' 박승민 (2021.09.23)

■ 마지막 힘 / 박승민 고구마를 걷어낸 밭에 상강 서리가 내리던 날 늙고 썩어 버려두었던 사과나무에 활짝, 하얀 꽃이 피었다 삼년 내내 풍으로 앓아 누운 주영광씨, 저녁나절 번쩍 눈떠 마누라 한번 쓱 보더니 “사과밭에 물!” 한마디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 한마디 결구를 맺느라 혼자서 무던히도 아프고 눈감지 못했던 것이다 - 《끝은 끝으로 이어진》 (창비, 2020) [감상] 해가 떠서 지는 하루의 시간은 사람이 태어나 죽는 일생에 비유되곤 한다. 정오의 태양을 청춘에, 저물녘의 태양을 노년에 빗대는 것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순리에 기반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삶은 참 덧없고 짧다. 일몰 직전 잠시 하늘이 밝아지는 순간을 일러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한다. 나아가 사람이 죽기 직전 잠시 기운이 돌..

[시 읽어주는 남자]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2021.09.23)

■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뿔》 (창비, 2002) [감상] 많은 시인들이 인생을 ‘길’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길의 의미는 대개 ‘선택’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명시감상] '할머니 듀오' 김영진 (2021.09.21)

■ 할머니 듀오 / 김영진 목욕탕 다녀오시나, 두 분 할머니 껍질 벗긴 삶은 계란마냥 하얗고 말간 얼굴로 도란도란 걷는다 동생, 이제 집에 가면 뭐 할랑가? 뭐하긴요, 시장에나 갈라요. 장에는 뭐 하러 갈라고 그란가? 영감 팔러 갈라 그라요 엥, 얼마에 팔라는디? 오천만 원만 주면 팔라고 그라요 오메야, 팔릴랑가 모르것네 그란디 그 돈 받으면 어디다 쓸라고? 천만 원 짜리 영감 있음 바꿀라고 그라요 목욕 바구니 든 두 분 할머니 구부러진 등 위로 햇살이 깔깔깔 빛난다 / 2021.09.21 마곡나루역(9호선)

[시 읽어주는 남자] '머나먼 옛집' 정병근 (2021.09.21)

■ 머나먼 옛집 / 정병근 땡볕 속을 천 리쯤 걸어가면 돋보기 초점 같은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을 백 년쯤 걸어가야 당도하는 집 붉은 부적이 문설주에 붙어 있는 집 남자들이 우물가에서 낫을 벼리고 여자들이 불을 때고 밥을 짓는 동안 살구나무 밑 평상엔 햇빛의 송사리떼 뒷간 똥통 속으로 감꽃이 툭툭 떨어졌다 바지랑대 높이 흰 빨래들 펄럭이고 담 밑에 채송화 맨드라미 함부로 자라 골목길 들어서면 쉽사리 허기가 찾아오는 집 젊은 삼촌들이 병풍처럼 둘러앉아 식사하는 집 지금부터 가면 백 년도 더 걸리는 집 내 걸음으로는 다시 못 가는, 갈 수 없는, 가고 싶은 - 《번개를 치다》 (문학과지성사, 2005) [감상] 삶의 거처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 집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다. 식구들이 모여 두런..

[시 읽어주는 남자] '모란' 이문재 (2021.09.21)

■ 모란/ 이문재 앞뜰이 생기면 두어평 앞뜰이 생기면 옮겨 심으리라 마음 속 피고 지던 모란 모란이 피면 마당에 나가서 보리라 엄동설한에도 피고 지던 그 마음속 백모란 - 월간 《시인동네》 (2020년 3월호) [감상]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흙의 기운을 느끼며 채소를 가꾸는 텃밭 체험의 보람은 친환경 먹거리를 얻는다는 실리적 측면보다 삭막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마음의 위로를 받는 심리적 측면에 있다 할 수 있다. 텃밭만이 아니라 정원을 가꾸는 일도 그렇다. 아파트를 비롯한 현대 도시의 거주공간은 대부분 마당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공동의 마당이어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꿀 처지가 못된다. 마당이나 뜰이 없는 집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He..

[시 읽어주는 남자] '하모니카 부는 참새' 함기석 (2021.09.21)

■ 하모니카 부는 참새 / 함기석 무더운 여름 오후다 참새가 교무실 창가로 날아와 하모니카를 분다 유리창은 조용조용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온다 물고기들은 빛으로 짠 예쁜 남방을 입고 살랑살랑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교무실을 유영하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선생들도 흘러내린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하고 시원한 물소리에 복도를 지나던 땀에 젖은 아이들이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고 들여다 본다 수학 선생도 사회 선생도 국사 선생도 보이지 않고 교무실은 온통 수영장이다 - 《뽈랑 공원》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감상] 학창시절의 추억에는 ..

[명시감상] '편지' 윤동주 (2021.09.19)

■ 편지 /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이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 2021.09.19(일) 옮겨 적음 사진 촬영: 양천향교역(9호선) https://youtu.be/QbNg73ke8ds https://youtu.be/WsgKWqXR5CI

[명시감상] '그 때' 정맹규, '오늘을 사랑하라' 토머스 칼라일, '장강후랑추전랑' (2021.09.11)

■ 그 때 / 정맹규 젊은 시절 그 때 청춘이라 말하기도 하고 철없던 시절이라 말하기도 했던 때 날짜 지난 버려진 신문지처럼 참 할 일 없이 살기도 했지 대박같은 행운의 인생 선물받고 잘 견디며 여기까지 왔건만 날개 잘려나간 지금 청춘이라 불려졌던 그날을 어찌 그리워하지 않으랴 몸은 세월 따라 끌려만 가는데 생각은 자꾸 뒤로 밀리는 슬픔 버려진 신문지 신세 같아도 그때를 추억하면 웃음꽃 피네 ■ 오늘을 사랑하라 /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어제는 이미 과거 속에 묻혀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오늘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라 오늘은 ..

[명시감상] '가을이 올 때', '묘비명', '가구의 힘' 박형준 (2021.09.08)

■ 가을이 올 때 / 박형준 뜰에 첫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 잘 마른 창호지 바른 문을 새로 단 방에서 잠을 자는 첫 밤에는 달그림자가 길어져서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바람이 찾아와서 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듯했다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 우리 집 방문에서, 가을이 깊어갔다 - 박형준,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비, 2020) ■ 묘비명 / 박형준 유별나게 ..

[명시감상] '오타' 전태련 시인(2021.09.05)

■ 오타 / 전태련 시인 컴퓨터 자판기로 별을 치다 벌을 치고 사슴을 치다 가슴을 친다. 오타 투성이 글 내 수족에 딸린 손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마음은 수십 번 그러지 말자 다짐하지만 남의 마음같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오타 어찌하랴, 어찌하랴, 입으로 치는 오타는 여지없이 상대의 맘에 상처를 남기고 돌아오는 것을 한번 친 오타 바로잡는 일 이틀, 사흘 그 가슴에 흔적 지우기 위해 얼마나 긴 세월 닦아야 할지 숱한 사람들 맘에 쳐날린 오타들 더러는 지우고 더러는 여전히 비뚤어진 채 못처럼 박혀 있을 헛디딘 것들 어쩌면 생은 그 자체로 오타가 아닌가 그때 그 순간의 선택이 옳았는가 곧은 길 버리고 몇 굽이 힘겹게 돌아치진 않았는가 돌아보면 내 삶의 팔할은 오타인 것을 (전태련·시인, 경북 칠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