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시 읽어주는 남자] '동백이 활짝' 송찬호 (2021.10.06)

■ 동백이 활짝 /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2000) [감상] 사자와 동백꽃… 일상에 생명력 불어넣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열에 아홉은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유는 먹고 사는 일에 쫓겨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 끝에 “너는 시를 쓰니까 우리보단 사는 게 재미있지?”라고 묻는다. 나라고 다를 게 있냐며 대답의 끝을 얼버무려보지만 선뜻 믿으려하지 않는다. 언젠가 고용노동부에서 직업별 연봉순위를 발표한 자료를 본적이 있었는데, 시인은 10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1,000위까지 발표한다 해도 사정은..

[시 읽어주는 남자] '일진'(日辰) 신현정 (2021.10.04)

■ 일진(日辰) / 신현정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 나온 보랏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 《자전거 도둑》 (애지, 2005) [감상] 죽음의 문턱서 느낀 ‘친숙한 두려움’ 언제부턴가 신문을 읽을 때 1면 주요기사를 제치고 ‘부음란’을 먼저 찾아 훑어보고 곧바로 ‘오늘의 운세’를 챙겨 보는 버릇이 생겼다. 죽음의 소식과 하루의 운세를 연달아 겹쳐 읽는 것이 참 이상야릇한 행동이라 여기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만..

[명시감상] '시월' 나희덕​, '시월' 이기철, '시월에' 문태준 (2021.10.03)

■ 시월 /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 나희덕,『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시 읽어주는 남자] '겨울산' 황지우 (2021.10.02)

■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감상] 침묵으로 삶을 가르치는 겨울산 다윗 왕의 반지에는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반지가 만들어진 사정은 이렇다. 소년시절에 거인 골리앗을 무릿매로 쓰러뜨려 단박에 영웅이 된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일을 위해 늘 전쟁터를 전전했다. 그런 그에게 승리에 도취하거나 패배에 좌절하는 것은 금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공사에게 기쁨을 억제할 수 있게 하..

[시 읽어주는 남자] '독락당(獨樂堂)' 조정권 (2021.10.02)

■ 독락당(獨樂堂) /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 - 《산정묘지》 (민음사, 2002) [감상] 숭고한 정신이 깃든 마음의 거처 세계를 조망하며 삶의 숭고(崇高)한 지표를 제시해주는 스승들이 없는 사회는 시끄럽고 지리멸렬하다. 크고 우뚝한 산맥이 있어야 능선이 뻗어나갈 수 있다. 요즘 시대는 스승이 없다. 아니, 스승들은 타살되었다. 자신이 마치 큰 인물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소영웅주의가 스승을 사지(死地)로 몰아냈다. 스승의 자리는 포털사이트가 차지했고, 지식은 검색의 결과가 되었다. 철학은 없고 실용만 난무한다. 정신적 가치는 야위고 물질적 가치만 비대해지는 불균형이..

[시 읽어주는 남자] '뒤편' 천양희 (2021.10.02)

■ 뒤편 /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들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감상] 앞만 보는 직선의 삶 잠시 뒤를 돌아보다 공원을 산책하다보면 가끔 뒤로 걷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앞으로 걷는 사람들도 그들을 피하려다 보니 불편한 기색이다. 앞을 보고 걷는 것이 정상인 세상에서 뒤를 보고 걷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뒤’라는 공간은 인간에게 불안, 죄의식, 퇴보 등과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한 사정은 “뒤가 구리다.”, “뒤로 물러나다.”, “뒷골이 서늘하다” 등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

[명시감상] '구월' 나태주, '가을이 왔다' 오규원, '흰 구름' 헤르만 헤세 (2021.10.01)

◇ 구월 / 나태주 ?? 구름이라도 구월의 흰구름은 미루나무의 강 언덕에 노래의 궁전을 짓는 흰 구름이다 강물이라도 구월의 강물은 햇볕에 눈물 반짝여 슬픔의 길을 만드는 강물이다 바라보라 구월의 흰 구름과 강물을 이미 그대는 사랑의 힘겨움과 삶의 그늘을 많이 알아버린 사람 햇볕이 엷어졌고 바람이 서늘어졌다 해서 서둘 것도 섭섭할 것도 없는 일 천천히 이마를 들어 구름의 궁전을 맞이하세나 고요히 눈을 열어 비늘의 강물을 떠나보내세 ◇ 가을이 왔다 / 오규원 ??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명시감상] '가을' 조병화, '꼭 말하고 싶었어요' 이해인, '가을하늘' 정연복 (2021.10.01)

◇ 가을 / 조병화 ??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 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 꼭 말하고 싶었어요 / 이해인 ?? 지나가는 세상 것에 너무 마음 붙이지 말고 좀 더 자유로워지라고 날마다 자라는 욕심의 키를 아주 조금씩 줄여가며 가볍게 사는 법을 구름에게 배우라고 구름처럼 쉬임없이 흘러가며 쉬임없이 사라지는 연습을 하라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의 구름이라면.... ◇ 가을하늘 / 정연복 ?? 가을하늘 왜 저리도 높푸르게 있을까 자신의 커다란 존재를 뽐내기 위함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가없이 넓고 깊은 바다 ..

[시 읽어주는 남자] '참음은' 김수영 (2021.09.30)

■ 참음은 / 김수영 참음은 어제를 생각하게 하고 어제의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새로 확장된 서울특별시 동남단 논두렁에 어는 막막한 얼음을 생각하게 하고 그리로 전근을 한 국민학교 선생을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쉬는 十분동안의 지루한 정차를 생각하게 하고 그 주막거리의 이름이 말죽거리라는 것까지도 무료하게 생각하게 하고 기적(奇蹟)을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죽은 기적을 산 기적으로 울리게 한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Baccalaureate)는 8개 분야로 나뉘어 치러지는데 특히 철학시험 논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어 수험생은 물론 각계각층의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철학시험 논제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출제가 있는데, “참을..

[시 읽어주는 남자] '봄 향기' 박노식(2021.09.30)

■ 봄 향기 / 박노식 장독대에 햇볕이 가득 차서 눈이 따갑다 수분이 달아난 독아지 뚜껑은 한결 가볍고 그 위에 몇 줌 호박씨를 말리는 사이에 산새들이 수없이 다녀가서 여기저기 콩알만큼 비었다 고무신 속엔 봄이 가득 들어와 걸음마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지나가는 바람보다 이웃 노부부의 두엄 더미가 더 들떠서 구린내가 봄 향기같이 올라온다 - 《고개 숙인 모든 것》 (푸른 사상, 2017) [감상] ‘오감’으로 만끽하는 푸르른 봄 신라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새들이 부딪힌 사연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세월이 지나 단청(丹靑)을 하였더니 날아드는 새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는 서양에도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