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조경님' 곽재구, '영숙이' 문성해, ​'우리 동네 구자명씨' 고정희 (2021.10.17)

◇ 조경님 / 곽재구 ​늦은 밤 남면 가는 시외버스 차창에서 고단한 네 하현의 눈썹을 보았구나 봉숭아 물든 손톱 너머로 고향집 마당 가득 푸른 하늘은 펼쳐 있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 억새밭 위로 희게 웃는 식구들의 얼굴도 보이겠지 감잣대를 엮어 말리는 엄마 곁에서 동생들은 또 지난 여름 산사태를 생각할까 흙더미에 묻힌 아버지와 막내 자갈길에 버스는 자꾸 퉁겨오르고 그때마다 깜박 깨어나는 네 졸음 속으로 덧없는 한 시대의 어둠과 슬픔은 밀려가고 차창 밖 어둠 속에 꽃을 던지는 마을의 도라지꽃 불빛이 스스럽다 여느 밤 충장로 거리에 나서면 가시내들은 엉덩이를 부풀린 목 짧은 바지에 퍼머넌트 히히덕거리고 무슨 잭슨 플록이다 카라얀이다 요란하지만 경님아 그것들이 지닌 영혼은 밤 버스에 깜박깜박 조는 고단한 네 일..

[명시감상] '내 친구 박원택' 정병근, '박득세' 곽재구, '허상진' 전성호 (2021.10.17)

◇ 내 친구 박원택 / 정병근 그라면 말할 수 있다 불알 두 쪽 차고 서울 올라와 구두를 닦다가 자장면을 나르다가 쇠를 지지다가 전기 기술자가 된 사연, 안 해본 일 없는 그의 손을 보라 절삭기에 썩둑 잘린 오른손 인지 끝이 부끄러워 사람과 악수할 때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왼쪽 손등에는 전기 스파크에 데인 자국 팔뚝엔 담뱃불로 지진 흔적 선명하다 그는 대체로 잘리고 데이고 지지면서 살았다 운명의 불똥이 그의 몸을 몇 번씩이나 뚫고 지나갔다 견디다 못한 아내가 도망가자 그는 아이들을 복지원에 맡겨놓고 설비 회사 바닥에서 혼자 자고, 밥 먹는다 내 친구 박원택이라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수줍게 웃으면서 술잔 비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술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칠 수 있다 - 정병근, 『번개를 치다』 ..

[명시감상] '유호' 전윤호, '실업자 고만석' 김진완, '개옻나무 종만이' 이봉환 (2021.10.17)

◇ 유호 / 전윤호 유호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선생님 아들 강돌처럼 작고 똘똘했지 길바닥이 뜨거운 여름이면 다리 밑에서 종일 함께 헤엄을 쳤어 남과 싸우지 않고 괴롭히지도 않는 모범생 어느 날 아침 수업이 시작됐는데 유호 책상이 비어 있었어 우리가 집으로 돌아온 저녁까지 학교에 가야 하는 아침까지 강에서 나오지 않은 거야 벌거벗고 헤엄치던 아이들은 그때부터 조금씩 강을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었지 학기 중에 이사 간 선생님처럼 고개 숙이고 떠나간 누이들처럼 세상은 이제 친구가 아니었어 하지만 난 함부로 떠들어댔지 무덤이 없으니 그놈도 도원으로 마실 간 거라고 저물녘이면 마지막으로 함께 놀았던 여울에서 두 손을 모아 이름을 외치면 벼랑에서 벼랑으로 왜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 전윤호, 『늦은 인사』 (실천문..

[명시감상] '김씨' 정희성, '벽 너머 남자' 김해자, '​李씨의 눈' 김명인 (2021.10.17)

◇ 김씨 / 정희성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의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 벽 너머 남자 / 김해자 가끔 공동 수돗가에서 만나면 사알짝 웃기도 했는데, 마당 끝에 있는 변소 앞에 줄 서 있기라도 하면 출근길 그 남자 미안한 듯 고개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느 차가운 밤 골목 입구에서, 고구마 냄새나는 따뜻한 비닐..

[명작수필] '찔레꽃 필 무렵' 목성균 (2021.10.16)

■ 찔레꽃 필 무렵 / 목성균 (수필가) 찔레꽃이 피면 나는 한하운처럼 울음을 삭이며 혼자 녹동 항에 가고 싶어진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누런 보리밭 사이로 난 전라도 천리 길을 뻐꾸기 울음소리에 발 맞추어 폴싹폴싹 붉은 황토 흙먼지 날리며 타박타박 걸어가고 싶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서러운 길인지 알고 싶다. 찔레꽃 하얗게 핀 산모퉁이 돌아서 “응야 차-. 응야 차-.” 건강한 젊은 육신들이 꺼끄러기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보리타작하는 소리 질펀한 동네 앞, 둥구나무 아래 앉아서 발싸개를 풀어 풀어 볼 것이다. 발가락은 다 있는지-. 구태여 그게 무슨 대수일까 마는 그래도 궁금한 사람의 마음을 어찌 당하랴. 발가락은 다 있다.일그러진 문둥이의 얼굴에 어린 기쁨, 보일까. 둥구나무 그늘 아래 이..

[명작수필] '명태에 관한 추억' 목성균 (2021.10.16)

■ 명태에 관한 추억 / 목성균 (수필가)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 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 투성이의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의 모습은 '천생연분'이란 제목을 달고 싶은 한 폭의 정물화였다. 밤이 이슥해서 취기가 도도해진 아버지가 명태 한 코를 들고 와서 마중하는 며느리에게 "옛다"하며 건네주시는 걸 본 적이 있다. 남용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 아버지의 호기가 참 보기 좋았다. 그 날, "아버님, 저녁 진짓상 차릴까요?" 며느리가 묻자 아버지는 "먹었다" 하시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며느리는 두루마기 자락을 추녀 밑에 걸어 놓은 등불에 비춰 보더니 즉시 우물로 가지고 가서 빨았다. 아버지는 취한 걸음으..

[명작수필] '행복한 군고구마' 목성균 (2021.10.16)

■ 행복한 군고구마 / 목성균 (수필가) 내가 강릉영림서 진부관리소 말단 직원일 때 월급이 칠천 몇 백원이었다. 그 돈으로 어린 애 둘과 아내와 내가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았다. 어떤 때는 아내가 담배를 외상으로 사다 줄 정도였다. 새댁이 담뱃갑을 건네주면서 조심스럽게 신랑한테 하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담배는 외상 주는 게 아니래. 자기 담배 못 끊지?” 늘 퇴근이 늦었다. 잔무가 있어서 늦을 때도 있었지만 잔무가 없어서 늦는 때도 많았다. 잔무가 없으면 미뤄두었던 고스톱 화투를 쳐야하기 때문이다. 직원들 간에 숙직실에서 화투를 치는 것은 동료애를 돈독히 하는 것이지 절대로 노름은 아니다. 특히 산읍이 눈 속에 깊이 묻히는 겨울에 그랬다. 어두워져서 전등에 스위치를 넣으면 늙은 소장님은 큰곰처럼 어정어..

[명시감상] '봄 안부' 강인호, '안부' 정병근, '안부' 맹문재, '안부' 이을남 (2021.10.15)

◇ 봄 안부 / 강인호 당신 없이도 또 봄날이어서 살구꽃 분홍빛 저리 환합니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찾아갔었을 분홍빛 오늘은 내 가슴에 스며듭니다. 머잖아 저 분홍빛 차차 엷어져서는 어느 날 푸른빛으로 사라지겠지요. 당신 가슴속에 스며들었을 내 추억도 이제 다 스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르는데 살구꽃 환한 나무 아래서 당신 생각합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 분홍빛이 그대와 나, 우리 가슴속에 찾아와 머물다 갈런지요. 잘 지내주어요. 더 이상 내가 그대 안의 분홍빛 아니어도 그대의 봄 아름답기를 - 강인호, 『울보 풀꽃』(대한문학, 2009) ◇ 안부 / 정병근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

[명시감상] '시골 버스' 손택수, '어떤 통화' 박성우, '강화운수에서는 아직도 담배를 피누나' 박철 (2021.10.15)

◇ 시골 버스 /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 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이는 시골 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니,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풀풀 날리며 한참을 지나쳤다 투덜투덜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 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 올린 포플러와 내가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명시감상] '오누이' 김명인 '먹돌' 이홍섭, '해남행 완행버스' 이창수 (2021.10.15)

◇ 오누이​ / 김명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