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작수필] '조팝나무 꽃 필 무렵' 목성균 (2021.10.22)

■ 조팝나무 꽃 필 무렵 / 목성균 진달래꽃이 노을처럼 져 버리면 섭섭한 마음을 채워 주듯 조팝나무 꽃이 핀다. 조팝나무 꽃은 고갯길 초입머리, 산발치, 산밭 두둑 같은 양지바른 곳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하얗게 핀다. 조팝나무 꽃은 멀리서 건너다 봐야 아름답다. 가깝게 보면 자디잔 꽃잎들이 소박할 뿐 별 볼품이 없으나 건너다보면 하얀 꽃무더기가 가난한 유생 댁의 과년瓜年에 채 못 미친 외동딸처럼 깨끗하고 얌전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조팝나무 꽃이 필 때의 산골 동네는 고요했다. 그러나 적막하지는 않다. 무슨 예사롭지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고요함이다. 이윽고 명주 필을 찢는 듯한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그 고요를 찢어놓는다. 그 소리는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다. 어느 소프라노 가수도 이르지 ..

[명시감상] '두 소년' 문태준, '오누이' 김사인, '계란만한 병아리들' 고형렬, '어떤 평화' 정현종 (2021.10.22)

◇ 두 소년 / 문태준 굵은 눈이 막 올 때는 두 소년이 생각난다 어느 해 어느 날인지는 가마득해 잊었지만 땔감을 사러 보육원에서 트럭이 온 날이었다 산 밑 우리 집에 따라와 땔나무를 싣던 두 소년 트럭 짐칸에 타고 굵은 눈 속으로 멀어져간 두 소년은 나와 또래라 했다 - 문태준,『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 ◇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

[명시감상] '허수아비' 정희성, '허수아비' 유안진, '허수아비' 조오현 (2021.10.22)

◇ 허수아비 / 정희성 참새가 참새인 것은 제가 참새인 줄 모르기 때문 허수아비가 허수아비인 것은 제 머리에 새가 앉아도 가만 있기 때문 허수아비 주인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것은 허수아비가 참새를 쫓아줄 거라 믿기 때문 이 땅의 농부가 농부인 것은 그런 줄 알면서도 벼 익는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우여어 우여어 허공에 헛손질하기 때문 - 정희성,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 허수아비 / 유안진 장가 든 적도 없는데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이름까지 깨끗한 허수(虛手)라는 파다한 소문이다 취중에도 결코 실수한 적 없었지만 심중에는 간절히 바랐던 적 있었으니, 낳아야 자식인가 키워도 자식이지, 키워보면 안다, 기른 정의 바닥 모를 깊이를 나 같은 빈손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니 들길까지 마중 나와 기..

[명시감상] '갈대' 신경림, '갈대' 마종기, '그 자리' 천양희 (2021.10.22)

◇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여름날』(미래사, 1991) ◇ 갈대 /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

[명작수필] '약손' 박문하 (2021.10.20)

■ 약손 / 박문하 여섯 살 난 막내딸이 밖에서 소꿉장난을 하다가, 눈에 티가 들어갔다고 울면서 들어왔다. 어린것들에게는 제 아버지라도 의사라면 무서운 모양인지, 아프지 않게 치료를 해 주마고 아무리 달래어도, 혹시 주사라도 놓을까 보아서 그런지 한층 더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할머니에게로 달아나 버린다. 할머니는 손녀(孫女)를 품안에 안으시고는 아픈 눈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시면서 자장가처럼 혼자말로 중얼거리시는 것이었다. "까치야, 까치야, 네 새끼 물에 빠지면 내가 건져 줄 터이니, 우리 민옥이 눈의 티 좀 꺼내 어 다오." 어린것은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의 품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어 버린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연세가 여든을 넘으셔서 고목(古木) 껍질처럼 마르고 ..

[명작수필] '비둘기의 외도' 박문하 (2021.10.20)

■ 비둘기의 외도 / 박문하 내 주택과 병원에 20여 평의 빈 터가 있어서 이것을 이용할 겸 취미 삼아서 나는 몇 년 전부터 꿩, 금계, 오골계, 짜보, 메추리 등을 기르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꿩과 금계만 백여 수를 부화시켜서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오골계, 짜보, 메추리알은 영약가가 높아서 가족들의 부식용에 쓰고 있다. 우리들처럼 가난한 나라에서는 취미생활도 소비성 일변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꿩이나 금계 등을 기르른 취미는 생산성이 있어서 물질적인 손해도 보지 않고 또 나처럼 병원을 경영하는 의사들에게는 온종일 환자들 속에 갇혀서 우울해진 신경을 풀어주기도 하고, 환자들에게는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잠깐 동안이나마 즐거움을 줄 수가 있어서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의 이중 삼중의 즐거..

[명작수필] '돌고기 안주' 박문하 (2021.10.20)

■ 돌고기 안주 / 박문하 여름 한철 동안은 병원의 진료시간이 낮과 밤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시원한 틈을 타서 환자들이 아침이나 밤중에만 병원에 몰려들기 때문에 더위가 한창인 대낮에는 병원이 텅텅 비워져 있을 때가 많다. 이러한 한낮이면 나는 여름 방학 동안에 집에서 놀고 있는 열 살짜리 막내딸인 민옥이를 데리고 곧잘 가까운 시냇가로 나간다. 포장이 잘된 시외도로를 버스로 약 30분 동안만 달리면 두구동과 양산 사이 경계선을 끼고 흐르는 큰 시냇가에 다다른다. 천변川邊 속에서는 한가로운 매미의 울음소리가 한창이다. 지금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고행풍경이 되살아 난 것 같다.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맑은 시냇물 속에 풍덩 뛰어들면 그 상쾌한 맛이란 해수욕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여름철..

[명작수필] '잃어버린 동화' 박문하 (2021.10.20)

■ 잃어버린 동화 / 박문하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비 속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곳이다. 와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이제 새로 집을 세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 공사가 되어져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미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고적도 아니요,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 고구려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한 칸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울리어 주는 것은 비단..

[명시감상] '어머니' 이성부, '어머니의 밥' 오봉옥, '수의를 입히며' 고정희​, '상여' 김선태 (2021.10.19)

■ 어머니 / 이성부 그 겨울 아침 함박눈 내려쌓이던 골목 뒤돌아보며 바쁜 걸음 모퉁이 사라지시던 어머니, 박수근의 기름 장수 木版畵 한 폭으로 살아서 오늘은 내 책상머리를 울고 가시네 함박눈 아니라도 좋아라 소나기 아니라도 좋아라 흩날리는 꽃이파리 아니라도 좋아라 하늘 가득히 내리는 말씀 아래 굵게 패인 刻刀 자국 속에 불끈 쥔 두 주먹 걷어붙인 팔뚝 멀리서 오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新兵이 되어 떠나간 아들을 생각하고 철없이 구는 어린것들을 생각하고 흰 눈에 각혈 한 번 하고 한세상 가슴앓이 눈 들어 먼산을 바라보시네 어떤 모진 6·25로도 어떤 불행으로도 빼앗길 수 없었던 목숨 질긴 목숨 오늘은 서울 모래내에서 汶山 가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내 책상머리 울고 가시네 ​- 이성부, 『깨끗한 나라』(미래..

[명시감상] '조묵단傳' 문인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박형준, '어머니의 세상' 마종기 (2021.10.19)

■ 조묵단傳 / 문인수 - 멍텅구리 배 한 척 김해녹십자노인요양병원 99세, 어머니의 바닥은 지금 인조가죽 매트리스 거기 전심전력, 전적으로 당신 한 몸 책임지고 앉아 있다, 누워 있다, 누웠다, 앉는다, 누웠다, 앉았다, 누웠다, 앉았다 해도 도무지 안 가는, 아, 멍텅구리 배 한 척, 간다 - 문인수, 『적막소리』 (창비, 2012) ■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 박형준 방아깨비 발처럼 끄덕끄덕 산 너머 구름을 잡아 뜯고 있는 어머니, 치매에 걸려 소녀가 되어 버린 어머니 채석장 인부에게 재가한 외할머니 그리워 지금도 산 너머 돌 깨는 소리에 가슴에 금이 간다며 비가 올라나 비가 올라나 낮게 중얼거리며 깨금발로 마당의 흙돌담에 서서 발목이 부은 어머니 하루하루 난쟁이가 되어 가는 여자가 어머니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