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둘기의 외도 / 박문하
내 주택과 병원에 20여 평의 빈 터가 있어서 이것을 이용할 겸 취미 삼아서 나는 몇 년 전부터 꿩, 금계, 오골계, 짜보, 메추리 등을 기르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꿩과 금계만 백여 수를 부화시켜서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오골계, 짜보, 메추리알은 영약가가 높아서 가족들의 부식용에 쓰고 있다. 우리들처럼 가난한 나라에서는 취미생활도 소비성 일변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꿩이나 금계 등을 기르른 취미는 생산성이 있어서 물질적인 손해도 보지 않고 또 나처럼 병원을 경영하는 의사들에게는 온종일 환자들 속에 갇혀서 우울해진 신경을 풀어주기도 하고, 환자들에게는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잠깐 동안이나마 즐거움을 줄 수가 있어서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의 이중 삼중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꿩이나 닭의 습성은 수컷 한 마리에 암컷 한 마리씩 짝을 지어 주어서는 수컷의 왕성한 정력에 암컷이 도저히 배겨나지를 못한다. 일부일처제도는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만들어진 것이지 이러한 조류나 동물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대개 수컷 한 마리에 암컷 4,5마리씩을 한 울안에 넣어서 기르는 것이 그들의 습성에 가장 알맞고 또 생산성을 높이는 데도 좋다. 그런데 이러한 꿩이나 닭들의 일부다처의 습성이 내 아내에게는 몹시 비위에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 이유인즉 커가는 집안 아이들의 교육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것이다. 대학시절에 교육 심리학을 전공한 아내이게 때문에 걸핏하면 이러한 교육론을 들고 나서지만 그것은 아이들의 교육론을 핑게 삼아서 은근히 지난날의 내 행적을 공박하고 앞으로 내 처신에 대해서 제재를 가하려는 아내의 약간 단수 높은 교육론임을 눈치 못 차릴 나도 아니었다.
이러한 아내의 꼬아진 심정도 풀어줄 겸 속죄의 뜻으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부의 금술이 좋다는 원앙새를 한 쌍 구해서 키워볼까 하였는데 그 값이 자그마치 10만 원을 호가하니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어림없는 생각이었다. 궁리한 나머지에 친구 집에서 기르는 흰색 비둘기 한 쌍을 구했었다. 비둘기도 원앙새에 못지않게 날 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나서 암수 사이에 금슬이 좋기로 모범적인 조류다. 내 집 정원의 푸른 잔디 위에서 이 한 쌍의 흰 비둘기가 짝을 지어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모이를 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평화와 행복을 상징하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런데 약 한 달이 지난 후에 이 행복한 한 쌍의 흰 비둘기들 앞에 뜻밖의 한 침입자가 나타났었다. 어느 날 회색의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왔었다. 아마 암컷인 모양으로 우리 집 흰 비둘기의 암컷과 그날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다. 흰 비둘기의 수컷은 두 암컷의 싸움을 재미있는 듯이 보고만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그 싸움이 일단 휴전상태가 되더니 우리 집 흰 암비둘기가 알을 낳고 집안에 들어앉아서 알을 품기 시작하였다. 찬스가 나빴던 것이었다. 그날로 이 기회를 놓칠세라 흰 비둘기 수놈과 회색 암 비둘기의 사랑의 랑데부가 시작되었다. 나는 마치 나 자신이 죄를 짓는 듯하여 마음이 조마조마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광경을 본 아내의 눈에는 쌍심지가 켜지기 시작하였다. 아내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회색 암 비둘기를 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색 암비둘기도 그에 지지 않고 집요하게 날아들어 왔었다. 드디어 아내는 지쳐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체념한 듯 방으로 들어가면서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던졌다.
“수컷은 모두 꼭 같구먼.”
비로소 아내도 자연과 생물의 위대한 법칙을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글=박문하 의사 · 수필가
◇ 박문하(朴文夏)[1918~1975]
부산 출신의 의사이자 수필가.
1.
아버지는 박용한(朴容翰)이고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이다. 아버지 박용한은 한말 동래 지역의 선각자들이 설립한 개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와 서울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탁지부 주사를 지내다가,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애국 지사였다. 박문하의 형제들은 모두 항일 투쟁에 헌신하였다. 누이인 박차정(朴次貞)은 동래 출신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하였다. 큰형 박문희(朴文熺)는 신간회의 중앙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둘째 형 박문호(朴文昊)는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박문하(朴文夏)는 1918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19번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문하의 성장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항일활동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누이 박차정이 1920년대 후반 동래일신여자학교 재학 중에 학생들의 집을 순방하며 비밀 연락을 다닐 때 8살 위인 누나의 손을 잡고 따라다니면서 사회의식을 길렀다.
1930년대에 형들과 누이가 모두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 활동을 할 때 박문하도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박문하의 나이가 어려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는 못하고 귀국하였다. 박문하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순국하였는데, 이후 형과 누이마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홀로 시련을 이겨 내며 공부해서 외과 의사가 되었다.
박문하는 이후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동래 시장 앞에 민중병원을 개원하여 동래 주민들 사이에 인술을 펼치는 의사로 유명하였다. 또한 수필에 대한 조예와 열정이 남달라 향파 이주홍(李周洪), 청마 유치환(柳致環), 삼오당 김소운(金素雲), 요산 김정한(金廷漢) 등 많은 문인들과 교우하였다. 박문하는 제4대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1960년대~1970년대에는 여러 편의 수필을 써 각종 일간지와 문예지에 발표하여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동래구 의사회장 등 의료 활동도 병행하였으나 만년에는 장남을 잃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진찰실에 소주병이 떨어진 날이 없었다고 하며 결국 간이 손상되어 1975년 3월 31일 동래구 수안동 자택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대표 작품으로는 『배꼽 없는 여인』·『인생 쌍화탕』·『약손』·『낙서 인생』 등 4권의 수필집이 있으며, 사후인 2008년 부산문인협회에서 『우하 박문하 전집』을 다시 펴냈다.
2.
수필가 · 의사. 부산시 동래구(東萊區) 출생. 호는 우하(雨荷). 독학으로 의학(醫學)을 전공. 의사가 되면서 육체적인 병과 정신적인 결함에서 오는 인간심리에서 소재를 단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잡지와 신문에 《약손》 · 《새벽에 돌아오다》 · 《손가락이 닮았소》 · 《나무로 살자》 · 《잃어버린 동화(童話)》 등 수백편의 수필을 발표했고, 수필집으로 《배꼽 없는 여인》(60) · 《인생쌍화탕(人生雙和湯》(63), 《약손》(65). 《씨뿌리는 사람들》(68) 《낙서인생(洛書人生》(72) 등이 있다. 부산 민중병원(民衆病院) 원장으로 국제펜클럽 한국위원,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 〈수필〉 동인, 부산시 문화상(文化賞)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 2021.10.2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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