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고기 안주 / 박문하
여름 한철 동안은 병원의 진료시간이 낮과 밤이 서로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 시원한 틈을 타서 환자들이 아침이나 밤중에만 병원에 몰려들기 때문에 더위가 한창인 대낮에는 병원이 텅텅 비워져 있을 때가 많다. 이러한 한낮이면 나는 여름 방학 동안에 집에서 놀고 있는 열 살짜리 막내딸인 민옥이를 데리고 곧잘 가까운 시냇가로 나간다.
포장이 잘된 시외도로를 버스로 약 30분 동안만 달리면 두구동과 양산 사이 경계선을 끼고 흐르는 큰 시냇가에 다다른다. 천변川邊 속에서는 한가로운 매미의 울음소리가 한창이다. 지금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고행풍경이 되살아 난 것 같다.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맑은 시냇물 속에 풍덩 뛰어들면 그 상쾌한 맛이란 해수욕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여름철에 북적거리는 바다보다도 조용한 시냇가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은 근년에 와서 차차 사람대하기가 싫어지는 반면에 수목이나 수석 같은 자연물레 정을 붙이게 된 때문이다. 나무 기르기보다도 수석 취미는 나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이어서 일단 채집만 해 놓으면 수장收藏하는 데는 힘이 들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몇몇 동호인들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먼저 대한수석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2회에 걸쳐서 수석전시회를 가진 바도 있다.
수석이란 용어는 산수경석山水景石이란 말을 줄인 말인데 그 산지에 따라서 산석山石 천석川石 해석海石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돌을 빼 놓고서는 별로 신통한 것이 없기 때문에 여름철의 채석採石은 비가 자주 내려서 냇물이 범람하여 물속에 파묻힌 돌이 노출되고 또 냇가의 돌이 깨끗이 씻어지는 천석川石이 가장 좋다.
금년 여름 들어서 벌써 10여 차례나 이곳 두구동 냇가를 찾았으나 번번이 빈손으로만 돌아갔건 것이 오늘은 간만에 꿈이 좋았던 탓인지 물고기 모양의 근사한 물형석物形石 한 개를 주었다. 너무나 마음이 흡족해서 천변가 주막에 들려서 돌을 술상 위에다 올려놓고 막걸리 한 잔을 청했다. 40대 주모는 돌 모양을 알아보았는지 “진짜 고기는 잡지 않고 돌 고기를 잡았군요.”하고는 웃는다.
돌 고기 한번 쳐다보고 술 한 잔 마시고 술 한 잔 마시고는 돌 고기를 어루만지는 내 모습이 하도 우스웠던지 주모 아주머니는 “옛날에 진주 자리꼽재가는 그래도 생선이라고 사서 달아 놓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밥을 넘겼다는데 돌덩어리만 쳐다보고 술 마시는 사람은 내 생전에 처음이야!” 하고는 투덜거린다. 그러나 오늘따라 술맛은 한결 더 풍미롭고 돌을 어루만지는 내 마음속에는 한 여름의 무더위쯤 간곳이 없고 다만 시원한 청풍만이 오락가락할 뿐이다.
글=박문하 의사 · 수필가
◇ 박문하(朴文夏)[1918~1975]
부산 출신의 의사이자 수필가.
1.
아버지는 박용한(朴容翰)이고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이다. 아버지 박용한은 한말 동래 지역의 선각자들이 설립한 개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와 서울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의 탁지부 주사를 지내다가,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항거하여 순국 자결한 애국 지사였다. 박문하의 형제들은 모두 항일 투쟁에 헌신하였다. 누이인 박차정(朴次貞)은 동래 출신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하였다. 큰형 박문희(朴文熺)는 신간회의 중앙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둘째 형 박문호(朴文昊)는 의열단 간부로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박문하(朴文夏)는 1918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19번지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문하의 성장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항일활동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누이 박차정이 1920년대 후반 동래일신여자학교 재학 중에 학생들의 집을 순방하며 비밀 연락을 다닐 때 8살 위인 누나의 손을 잡고 따라다니면서 사회의식을 길렀다.
1930년대에 형들과 누이가 모두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 활동을 할 때 박문하도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박문하의 나이가 어려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는 못하고 귀국하였다. 박문하가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순국하였는데, 이후 형과 누이마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홀로 시련을 이겨 내며 공부해서 외과 의사가 되었다.
박문하는 이후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동래 시장 앞에 민중병원을 개원하여 동래 주민들 사이에 인술을 펼치는 의사로 유명하였다. 또한 수필에 대한 조예와 열정이 남달라 향파 이주홍(李周洪), 청마 유치환(柳致環), 삼오당 김소운(金素雲), 요산 김정한(金廷漢) 등 많은 문인들과 교우하였다. 박문하는 제4대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1960년대~1970년대에는 여러 편의 수필을 써 각종 일간지와 문예지에 발표하여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다. 동래구 의사회장 등 의료 활동도 병행하였으나 만년에는 장남을 잃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진찰실에 소주병이 떨어진 날이 없었다고 하며 결국 간이 손상되어 1975년 3월 31일 동래구 수안동 자택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대표 작품으로는 『배꼽 없는 여인』·『인생 쌍화탕』·『약손』·『낙서 인생』 등 4권의 수필집이 있으며, 사후인 2008년 부산문인협회에서 『우하 박문하 전집』을 다시 펴냈다.
2.
수필가 · 의사. 부산시 동래구(東萊區) 출생. 호는 우하(雨荷). 독학으로 의학(醫學)을 전공. 의사가 되면서 육체적인 병과 정신적인 결함에서 오는 인간심리에서 소재를 단 수필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잡지와 신문에 《약손》 · 《새벽에 돌아오다》 · 《손가락이 닮았소》 · 《나무로 살자》 · 《잃어버린 동화(童話)》 등 수백편의 수필을 발표했고, 수필집으로 《배꼽 없는 여인》(60) · 《인생쌍화탕(人生雙和湯》(63), 《약손》(65). 《씨뿌리는 사람들》(68) 《낙서인생(洛書人生》(72) 등이 있다. 부산 민중병원(民衆病院) 원장으로 국제펜클럽 한국위원,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 〈수필〉 동인, 부산시 문화상(文化賞)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 2021.10.2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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