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님의 우물 / 고광헌 우물 속으로 무심한 별들이 쏟아지던 밤 행여 들킬까봐 교복을 입고 싶은 누님의 흐느끼는 소리 수백년 향나무들이 숨겨주었네 밤새 얇게 여윈 잔등 쓸어주며 목젖 아래로 우시던 어머니 통신교재 갈피마다 채송화 꽃잎 같은 한숨 그날 새벽에도 누님은 향나무 우물 속에 첫 두레박을 내렸네 속이 새까맣게 탄 별들이 마냥 우물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네 - 고광헌, 『시간은 무겁다』 (창비, 2011) ■ 정님이 / 이시영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