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누님의 우물' 고광헌, '정님이' 이시영, '섬진강 4' 김용택(2021.10.25)

■ 누님의 우물 / 고광헌 우물 속으로 무심한 별들이 쏟아지던 밤 행여 들킬까봐 교복을 입고 싶은 누님의 흐느끼는 소리 수백년 향나무들이 숨겨주었네 밤새 얇게 여윈 잔등 쓸어주며 목젖 아래로 우시던 어머니 통신교재 갈피마다 채송화 꽃잎 같은 한숨 그날 새벽에도 누님은 향나무 우물 속에 첫 두레박을 내렸네 속이 새까맣게 탄 별들이 마냥 우물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네 - 고광헌, ​『시간은 무겁다』 (창비, 2011) ​■ 정님이 / 이시영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

[명시감상] '첫 기억' 문태준, '영희 누나' 오탁번, '춘자 누나' 최동호 (2021.10.25)

■ 첫 기억 / 문태준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 살이나 되었을까 볕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 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 문태준 『불교문예』 2020년 봄호 ■ 영희 누나 / 오탁번 내가 백운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등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느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나를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

[명작수필] '그 날의 기적소리' 김수봉 (2021.10.25)

■ 그 날의 기적소리 / 김수봉 쌀자루를 짊어진 아버지가 앞에서 뛰고 그 뒤를 바싹 아들도 달린다. 아들의 한 손엔 책가방, 다른 손엔 새끼줄로 동여맨 김치 단지가 들렸다. 기차는 길게 기적을 울리며 산모롱이를 돌아오고, 차를 타러 달려가는 두 마음은 뛰는 다리보다 급하다. 기적 소리의 가늠만으로도 기차가 곧 아버지와 아들을 앞질러 정거장에 닿아버릴 것 같다. 더 힘껏 뛰어야 한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초가을 햇볕은 목덜미를 유난히도 따갑게 비추고 숨은 턱에 차오른다. 기차와의 경주다. 차가 역에 닿기 전, 아니 나란히라도 역 구내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아들은 기차를 타고 도청 소재지로 가서 내일 월요일에 학교를 갈 수 있다. 울퉁불퉁 자갈 깔린 신작로, 가물은 땅에서 먼지는 풀썩거리고, 아버지의..

[명작수필] '폐교에 뜨는 별' 정목일(2021.10.25)

■ 폐교에 뜨는 별 / 정목일(鄭木日) ‘한번 찾아가 보리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껴둔 곳이 있다. 사람마다 ‘추억의 성소(聖所)’가 있기 마련인데, 나에게도 그런 곳인 셈이다. 시야에 남덕유산과 학교 모습이 보이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을까? 학교 풍경과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 20대 총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폐교가 된 지 오래된 운동장엔 잡초가 무성했다. 교사(校舍) 중앙에 ‘정직·질서·창조’라는 교훈이 그대로 붙어 있을 뿐 운동장엔 아이들 대신 잡초만 자라고 있었다. 교기 없는 게양대는 녹이 슬어 벌겋게 변해 버렸지만 풍향계는 혼자 돌고 있었다. 나는 문짝이 떨어져 나간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여다놓았다. 2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실이며, 교무..

[명작수필] '돼지불알' 목성균 (2021.10.25)

■ 돼지불알 / 목성균 상달 저녁 때, 사랑에 군불을 지피고 앉아서 쇠죽솥의 여물 익는 냄새를 맞으면 잔잔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마른 장작이 거침없이 불타는 평화로운 화력에 허전한 마음을 데우면 풍흉(豊凶) 간에 일년 농사를 마무리한 농사꾼으로서의 노고가 대견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애착심이 곧 행복이다. 따라서 행복은 모든 삶에 균등하게 적용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항구적인 가난에도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행복의 경지가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다. 초겨울 저녁 군불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은 농사꾼만 안다. 그래서 삶은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 울을 넘어와서 나의 안분지족을 무차별적으로 공략하던 냄새가 있었으니, 앞집 원규 어르신네가 잔칫집 돼지를..

[명시감상] '공덕동 풍경' 고광헌, '아현동 블루스' 박소란, 'post- 아현동' 안현미 (2021.10.24)

■ 공덕동 풍경 / 고광헌 새 아파트 단지에 갇힌 오랜 골목길 재개발구역 키 낮은 불빛들 발길에 차인다 어느 가족의 늦은 저녁식사도 귀갓길 무릎 아래 사선으로 찍힌다 반지하 반쯤 수평으로 그어진 창밖 화분들 화분에서 자라는 분꽃 모가지들 잎 꾹 다물고 우린 밥 먹었다는 표정이다 재개발 붉은 숫자들 깨진 암호처럼 담벼락 여기저기 어지럽다 - 고광헌, 『시간이 무겁다』 (창비, 2011) ■ 아현동 블루스 / 박소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쇼윈도우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살이라도 차린다..

[명시감상] '104번지의 골목' 김명수, '청량리 황혼' 허연, '왕십리', '지상의 방 한칸' 이시영 (2021.10.24)

■ 104번지의 골목 / 김명수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산비탈 언덕바지 슬레이트집들 사이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보고 방긋이 웃어주는 계집애야 아버지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머니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하루종일 뛰어노는 계집애야 네 어머니 저 아래 난전바닥에서 쌀 한 말어치도 안되는 좌판을 벌여놓고 하루종일 먼지 속에 사는 것을 나는 안다 온종일을 배고프게 혼자 놀아도 때묻은 손 그 흔한 인형 하나 못 가지고 돌멩이 사금파리 주워 노는 계집애야 네 어머니 밤늦게 너를 찾아와도 너는 지쳐서 먼저 잠들고 네 아버지 공사장에서 밤늦게 돌아와도 너는 먼저 지쳐서 잠이 드는 아이야 삶에 지친 이 골목 가난한 어버이는 네 웃음 하나뿐인 위안으로 여기며 서러운 하루를 희망으로 산단다 하..

[명시감상] '상계동' 허연, '정릉 명호 호프집에서' 강세환,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신경림 (2021.10.24)

■ 상계동 / 허연 시골에서 갓 올라온 여공들이 수다를 떨며 무단 횡단을 하던 그 거리 뒤편에는 주거 부정의 고양이들이 해장국집 쓰레기통 부근에 모여 있곤 했습니다 마을버스가 들어오면 하루 종일 강요에 지친 다 똑같은 얼굴들이 제각기 골목으로 떠밀려 가고 팔뚝에 문신을 새긴 아이들이 벼랑으로 몰린 채 비에 젖고 있었습니다 선택이라는 말은 한번도 있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절망을 주택복권이나 몇 잔의 술로 대신하는 나름대로의 재주가 있을 뿐 우리에겐 텔레비전이나 소문에 묻어 오는 자유가 전부였습니다 실직한 청년들은 밤새 금이 간 남의 집 벽에다 낯 뜨거운 사랑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쓰러지고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그래도 아침이면 어느새 능청스러운 햇살이 방 한가운데 들어와..

[명작수필] '망초꽃 핀 언덕' 박영수 (2021.10.22)

■ 망초꽃 핀 언덕 / 박영수 중앙공원 은행나무 그늘에 초로(初老)의 남녀가 서 있다. 천천히 다가가는 나를 향해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보낸다.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축복인양 눈부시다. 세월의 강을 건너가듯 뚜벅뚜벅 그녀 앞에 선다. 사이버 공간에 들어선 느낌이다. 너무도 변해 있을 얼굴 쪽으로 차마 시선을 주지 못하고 손을 잡는데 옆에 느껴지는 인기척. 그녀의 남편이다. 그토록 만나지 않겠다고 버티던 부인을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고마운 사람. 중후한 인품의 덕스러운 얼굴이다. 공손히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며 통성명을 한다. 40여 년만의 재상봉이다. 순백의 소년시절. 고향마을에서 냉랭한 모습으로 멀어져간 꿈의 표상. 가슴깊이 간직되어 있던 그 소녀를 첫사랑이라 부를까. 아니 나 혼자서 애를 태웠..

[명작수필] '정류장에서' 강호형 (2021.10.22)

■ 정류장에서 / 강호형 첫눈이 함박눈이면 공연히 마음이 들떠서 아무 할 일이 없어도 분주해진다. 펑펑 쏟아져내리는 눈송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근거도 없이 어디엔가 좋은 사람,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겨울 가뭄이 심하여 함박눈을 고대하고 있던 참인데, 추적거리던 겨울비가 진눈개비로 변하고 있었다. 퇴근버스에서 내리니 정류장에는 마중나온 사람들로 때아닌 우산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귀가하는 시각이 일정치 않은 나에게 마중나온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반갑게 맞이하는 정경들이 부럽기도 하여 혹시나 하고 한 차례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아침에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내일이 휴일인 데다가 마침 집안 어른의 생신이라 아이들 데리고 먼저 갈 테니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