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그 날의 기적소리' 김수봉 (2021.10.25)

푸레택 2021. 10. 25. 08:30

■ 그 날의 기적소리 / 김수봉


쌀자루를 짊어진 아버지가 앞에서 뛰고 그 뒤를 바싹 아들도 달린다. 아들의 한 손엔 책가방, 다른 손엔 새끼줄로 동여맨 김치 단지가 들렸다. 기차는 길게 기적을 울리며 산모롱이를 돌아오고, 차를 타러 달려가는 두 마음은 뛰는 다리보다 급하다. 기적 소리의 가늠만으로도 기차가 곧 아버지와 아들을 앞질러 정거장에 닿아버릴 것 같다.

더 힘껏 뛰어야 한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초가을 햇볕은 목덜미를 유난히도 따갑게 비추고 숨은 턱에 차오른다. 기차와의 경주다. 차가 역에 닿기 전, 아니 나란히라도 역 구내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아들은 기차를 타고 도청 소재지로 가서 내일 월요일에 학교를 갈 수 있다.

울퉁불퉁 자갈 깔린 신작로, 가물은 땅에서 먼지는 풀썩거리고, 아버지의 땀밴 고무신 한 짝이 벗겨져 나간다. 아버지는 재빨리 다시 꿰어 신고 뛴다. 새끼줄로 칭칭 얽어 손잡이를 낸 김치단지가 뛸수록 무거워진다. 손바닥이 잘려나가는 것 같다. 그러나 잠시도 쉬거나 손바꿈마저 할 수가 없다.

기차는 꽥─ 다시 기적을 울리고, 그것은 ‘뚜우나 ‘뛰─가 아닌 성난 짐승의 소리였다. 이제는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도 요란히 다가온다. 달려오는 기차를 보면서 뛰는 마음은 쫓기는 두 마리의 짐승이다.

주말에 시골집에 온 아들의 수업료를 마련키 위해 읍내로 나갔던 어머니가 너무 늦게 와준 것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10분만 아니 5분만이라도 더 일찍 와주었어도… 철길과 신작로를 나란히 끼고 있는 저만큼의 간이역 플렛폼이 아득히 멀어 보인다. 역 구내의 시그널은 이미 내려졌다.

덜크덩 덜크덩, 기차가 가까이 다가오는 육중한 레일 소리가 헐떡거리는 숨소리만큼 크게 울린다. 어림없는 기차와의 경주다. 그러나 달려야 한다. 결코 기차를 놓쳐서는 안 되고, 내일 학교를 못 가게 되어서도 안 된다. 착실히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자 어렵게 마련한 수업료를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고 뛰는 아들이다.

기차여! 제발 제발 조금만, 1분만 늦어줘 다오. 그러나 기차는 짧게 또 한번 기적을 울리며 그 육중한 모습으로 부자의 뒷덜미를 덮칠 듯 다가온다. 아버지와 그 아들은 철도 옆길을 마지막 안간힘으로 뛴다. 땀이 눈을 가리고 등짝이 척척하다. 아버지의 고무신 한 짝이 또 벗겨져 나간다. 아버지는 남은 한 짝마저 아예 벗어던지고 달린다.

세찬 바람과 함께 기차는 귀청을 찢는 소리를 내며 앞질러 간다. 이제 간이역으로 들어선 기차가 멎어주는 1분, 그 1분 동안 객차에 다가가 아들은 타야하고 아버지는 쌀자루를 실어줘야 한다. 역 대합실을 거쳐 차표를 사고 개찰을 해야 하는 절차가 있을 수 없다. 플렛폼에 올라서서 기차 꼬리에라도 매달리면 다행이다.

어느새 1분이란 시간이 지났는지 승객 몇 사람을 내려놓은 차는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짐승 같은 기적 소리를 길게 울리고는 화통에선 ‘치익 푸욱' 하얀 증기도 뿜어내며 다시 서서히 구르기 시작한다. 타야만 한다.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일념뿐이었다. 어떻게 맨 뒤 칸 객차 승강구의 손잡이를 붙들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쌀자루를 먼저 던져 넣고 아들의 몸뚱이도 또 쌀자루처럼 힘껏 안아 디밀어 올렸다.

아들이 차에 실리는 것을 본 아버지는 몇 발을 더 그렇게 뜀박질로 따르더니 다리가 꺾인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난간에 매달린 채 아들이 밖을 내다보았을 때, 아직 젊은 중년의 아버지는 그렇게 털썩 앉은 모습인 채 기차꼬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고무신이 벗겨져 맨발 그대로. 아들은 한 점의 점으로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가 순간 시야를 가려버리는 땀인지 눈물인지에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중년의 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철길 위에 앉아 있었을까. 그렇게라도 아들을 차에 태워 보낸 안도였을까, 절망이었을까, 무능과 가난을 자책하는 비통이었을까? 그때도 그 후에도 그것을 물어보지 못한 아들이었다.

비추는 햇볕이 따갑게 느껴지던 시월의 마지막 주말, 다음 월요일은 시험이자 수업료 마감 날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읍내에 나가‘꿈질'과 품삯 선수금으로 수업료를 맞춰 오느라 막차 시간에 빠듯이 임박해서 돌아왔다. 돈을 꾸겨 쥔 어머니는 문간에 들어서며 어서 떠나라는 손짓부터 했다.

목이 메어 오는 바람에 어머니도 나도 인사말을 미처 나누지 못하고 기차역을 향해 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말할 수 없이 불편하던 6·25직후, 백여 리 남짓인 도청 소재지였지만 기차밖에는, 그것도 하루 세 차례밖엔 왕래가 없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문득문득 철길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그 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그 날의 땀과 눈물과 그 안간힘으로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달리는 기차를 따라잡던 그 의지, 그러나 그 의지의 반쯤은 아버지가 함께 뛰어준 힘이었다.

기적 소리는 지금도 내 귀에 끊임없이 울려오고 더욱 뛰어서 따라잡아야 할 기차는 몇 차례고 내 곁을 스쳐가지만, 나는 정작 달리지 못하고 놓쳐버린 차가 많다. 더구나 나는, 나의 아들에게 그 옛날 아버지처럼 함께 힘내어 뛰어 주지도 못하는 무능한 아비인 것만 같다.

글=김수봉

작가 약력
1937년 전남 나주 출생
《월간문학》 수필 당선. 전남문협 수필분과위원장, 광주문협, 무등수필 회장 역임. 1989년 제2회 광주문학상 수상 외 현대수필문학상, 소월문학상, 한림문학상 등 수상.

수필집 《전라도 말씨로》 《예던 길 앞에 있네》 《환상의 魚信을 찾아》 《역말 가는 길》 《그날의 기적소리》 《삼밭에 죽순 나니》 《포클레인과 패랭이꽃》외 다수.

/ 2021.10.2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