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누님의 우물' 고광헌, '정님이' 이시영, '섬진강 4' 김용택(2021.10.25)

푸레택 2021. 10. 25. 22:19

■ 누님의 우물 / 고광헌

우물 속으로
무심한 별들이 쏟아지던 밤

행여 들킬까봐
교복을 입고 싶은 누님의 흐느끼는 소리
수백년 향나무들이
숨겨주었네

밤새
얇게 여윈 잔등 쓸어주며
목젖 아래로 우시던 어머니

통신교재 갈피마다
채송화 꽃잎 같은 한숨
그날 새벽에도 누님은
향나무 우물 속에 첫 두레박을 내렸네

속이 새까맣게 탄 별들이
마냥
우물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네

- 고광헌, ​『시간은 무겁다』 (창비, 2011)

​■ 정님이 / 이시영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밤 베틀에 고개숙여
달그랑 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 이시영, 『滿月』 (창작과비평사, 1976)

​■ 섬진강 4 / 김용택

누님. 누님들 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희고 자태가 곱던 누님. 앞산에 달이 떠오르면 말수가 적어 근심 낀 것 같던 얼굴로 달그늘진 강 건너 산속의 창호지 불빛을 마룻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던 누님. 이따금 수그린 얼굴 가만히 들어 달을 바라보면 달빛이 얼굴 가득 담겨지고, 누님의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 그렁그렁한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누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왠지 나는 늘 그랬어요. 나는 누님의 어둔 등에 기대고 싶은 슬픔으로 이만치 떨어져 언제나 서 있곤 했지요. 그런 나를 어쩌다 누님이 누님의 가슴에 꼭 껴안아주면 나는 누님의 그 끝없이 포근한 가슴 깊은 곳이 얼마나 아늑했는지 모릅니다. 나를 안은 누님은 먼 달빛을 바라보며 내 등을 또닥거려 잠재워주곤 했지요. 선명한 가르맛길을 내려와 넓은 이마의 다소곳한 그늘, 그 그늘을 잡을 듯 잡을 듯 나는 잠들곤 했지요.

징검다리에서 자욱하게 죽고 사는 달빛, 이따금 누님은 그 징검다리께로 눈을 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지요. 강 건너 그늘진 산속에서 산자락을 들추면 걸어나와 달빛속에 징검다리를 하나둘 건너올 누군가를 누님은 기다리듯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나 누님. 누님이 그 잔잔한 이마로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을, 누님 스스로 징검다리를 건너 산자락을 들추고 산그늘 속으로 사라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세월이 흐른 후, 나도 누님처럼 마룻기둥에 기대어 얼굴에 달빛을 가득 받으며 불빛이 하나둘 살아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누님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니며 그냥 흘러가는 세월과 흘러오는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헤어져 캄캄한 어둠속을 헤매이며 아픔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렸는지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인지요 누님.

누님, 누님의 세월, 그 세월을, 아름답고 슬픈 세월을 지금 나도 보는 듯합니다.

누님, 오늘도 그렇게 달이 느지막이 떠오릅니다. 달그늘진 어둔 산자락 끝이 누님의 치마폭같이 기다림의 세월인 양 펄럭이는 듯합니다. 강변의 하얀 갈대들이 누님의 손짓인 양 그래그래 하며 무엇인가를 부르고 보내는 듯합니다. 하나둘 불빛이 살아났다 사라지면서 달이 이만큼 와 앞산 얼굴이 조금씩 들춰집니다. 아, 앞산, 앞산이 훤하게 이마 가까이 다가옵니다. 누님, 오늘밤 처음으로 불빛 하나 다정하게 강을 건너와 내 시린 가슴속에 자리잡아 따사롭게 타오릅니다. 비로소 나는 누님의 따뜻한 세월이 되고, 누님이 가르쳐준 그 그리움과 기다림과 아름다운 바라봄이 사랑의 완성을 향함이었고 그 사랑은 세월의 따뜻한 깊이를 눈치챘을 때 비로소 완성되어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님, 오늘밤 불빛 하나 오래오래 내 가슴에 남아 타는 뜻을 알겠습니다. 누님, 누님은 차가운 강 건너온 사랑입니다.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기 위하여, 오늘밤 나는 사랑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 불빛을 따뜻이 품고 자려 합니다. 누님이 만나고 헤어진 사랑을 사랑하며 기다렸듯 그런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누님의 초상을 닦아 달빛을 받아 강 건너 한자락 어둔 산속을 비춰봅니다.

- 김용택,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1)

[출처] 《주제시 모음》 느티나무

/ 2021.10.25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브랜드 있는 선생님 : 네이버 블로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매일 답을 하고 있는 중이다.

blo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