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기억 / 문태준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 살이나 되었을까
볕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 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 문태준 『불교문예』 2020년 봄호
■ 영희 누나 / 오탁번
내가 백운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충주사범을 갓 졸업한 권영희 선생님이
나의 담임교사로 부임해 왔다
내 생애의 한복판에 민들레꽃으로 피어서
배고픈 열한살의 나를 숨막히게 했다
멀리 솟은 천등산 아래 잠든 마을에
풍금을 잘 치는 예쁜 여교사가 왔다
어느 날 하교길에 개울의 돌다리를 건너며
들국화 한 송이 가리키듯 나를 손짓했다
탁번아 너 내 동생되지 않을래?
전쟁 때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오빠도 군대에 가서 나는 너무 외롭단다
선생님이 누나가 되는 정말 이상한 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
송화가루 날리는 봄언덕에서
나는 산새처럼 지저귀며 날아올랐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누나다 영희누나다
가을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 오탁번, 『겨울강』 (세계사, 1994)
■ 춘자 누나 / 최동호
春子가 와서 너를 업어주던 때가 아마 열두 살이었을 게야…… 그 아이 아버지가 찾아와 하도 먹을 것이 없다고 해 끼니라도 때우라고 거두어 주었는데, 어린 것이 남의 집에 와 힘들었겠지…… 갑자기 기억도 아스라한 열두 살 계집아이 앙당한 등이 담쟁이 줄기처럼 선하게 떠오르고 칭얼대다 잠들던 어린 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春子 그 아이도 벌써 반백의 할머니가 되었다고 하드라지…… 어머니의 말끝이 어둑해졌다…… 늦잠을 깨웠다고 투정부리다 엄마에게 야단맞고 허둥거리며 아침 늦게 학교에 간 단발머리 딸아이는 이제 열두 살! 칭얼거리던 나를 달래던 열두 살 계집아이의 한 뼘 앙당한 등이 투정부리던 아이의 뒷모습에 겹쳐 안스럽게 따뜻했다.
아버지 가시고 고독의 무게로 더욱 허리가 굵어진 어머니와 오랜 세월의 말벗처럼 단풍잎 다 떨어진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겨울바람의 차가움이 살풋 이마에 감도는 늦은 가을 저녁 철없는 어린시절 나를 등에 업어주던 春子 누나의 세상살이 이야기가 어스름 연기처럼 골목길 돌아 나와 어두워지는 거실 바닥에 낮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애잔한 어둠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 최동호, 『불꽃 비단벌레』 (서정시학, 2009)
[출처] 《주제시 모음》 느티나무
/ 2021.10.25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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