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빛과 누나 / 조태일
달빛이 좋아
처녓적 늘 울멍울멍했던 우리 누나는
풀벌레 밤새 뒤척이는 영남땅에
누워계신다
단신으로 월남한
함경도 사내 지아비로 삼아
아들딸 낳고 대구에서 사십여 년 살다가
어느해 여름
처녓적 삼밭머리 뽕나무밭
산꿩소리 그리워서
삼베옷 명주꽃신 신고 누어서
달빛 같은 처녀 몸으로
남도땅 동리산 태안사 염불소리 들으며
영남 땅에 누워 계신다
- 조태일, 『푸른 하늘과 붉은 황토』 (시인생각, 2013)
■ 추석달 / 손택수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는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 손택수, 『목련 전차』 (창비, 2006)
■ 누님의 가을 / 김명인
누님은 오랜 기침 끝에 마지막 늑막을 앓았습니다
머리맡에는 아버님께서 띄워보낸
종이배 한 척이 흘러들어
가을은 문밖 너도밤나무 잎새에까지 와 닿아 있었습니다
해 그림자 설핏하면 조카들은
언덕에 올라 청댓잎 따 풀피리 불어서
누님의 처녀 적 갈래머리는 구름 속에서
노을과 함께 너풀대다가
힘에 부치면 겨우겨우 내 어깨쯤에
내려서곤 하였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지상의 것임은
이미 손아래 누이가 죽은 몇 해 전에
입버릇처럼 어머님께서 일러주셨습니다
철 이른 단풍도 고삐 풀리면 저렇게
철없이 천방만화로 휘젓고 다니는 산길로
이따금 딴 세상의 바람 몇 줄기 몰려와 노는 것을 보면서
더러더러 제 살도 뜯으며 우리는 욕되게
살아 있음을 나누어갖기도 하였습니다
남은 남매들의 세월이 서두르지 않고 조심조심
짜지는 동안에도 싸움이 왁자지껄한 땅에는
누님의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는 어느 연대조차
이로써 조이삭 고개 숙이면 언덕 위로
찬바람 설겅이며 지나가는 해마다의 가을입니다
- 김명인, 『머나먼 곳 스와니』 (문학과지성사, 1988)
■ 시자 누나 / 이시영
전주시 우이동 살 때 김 순경 집 딸 시자 누나. 새벽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고개를 갸웃하고 우리 집 우물에 긴 두레박줄 내려 물 길어갔지. 첫서리 내린 인후동 고개 넘어 잰걸음으로 학교 갈 때도 역시 고개를 갸웃하고 무거운 책가방 들고 걷던 전주여고생. 3년 동안 이웃에 살면서도 단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나는 눈 감고도 누나가 지금쯤 어디를 지나는지 훤히 알 수 있었지. 장작 짐 실은 말들이 더운 김 내뿜으며 시내로 향하던 길, 도마다리 성황당 고개 넘어 철둑길, 그리고 병무청 사거리 지나 풍남동. 그러나 누나에게 딱 어울린 길은 밭둑에 자운영 자욱하던 인후동 들머리 언덕길. 꼭 그맘때면 '고등국어 1'과 도시락을 실은 국어 선생님이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담도 울도 없는 마당에서 빨래하고 밥 짓는 연기 피워올리던 누나. 덩치 큰 아버지가 술 냄새 풍기며 간혹 집안을 들었다 놓는 날이면 어린 동생을 안고 돌아서서 하늘만 보던 하이얀 이마. 이튿날 새벽이면 양철 두레박 떨어뜨리며 말없이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끙 하고 시원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곤 했다. 딱 한번 하굣길에서 만났던 곳이 시내가 끝나는 과수원집 좁은 논둑길.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향긋한 머릿내였던가. 순간 시자 누나가 내 몸에 엎어지며 풍기던 뜨겁고 알싸한 그 내음새는.
- 이시영, 『하동』 (창비, 2017)
[출처] 《주제시 모음》 느티나무
/ 2021.10.25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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