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계동 / 허연
시골에서 갓 올라온 여공들이
수다를 떨며 무단 횡단을 하던
그 거리 뒤편에는
주거 부정의 고양이들이
해장국집 쓰레기통 부근에 모여 있곤 했습니다
마을버스가 들어오면
하루 종일 강요에 지친 다 똑같은 얼굴들이
제각기 골목으로 떠밀려 가고
팔뚝에 문신을 새긴 아이들이
벼랑으로 몰린 채 비에 젖고 있었습니다
선택이라는 말은 한번도 있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절망을
주택복권이나 몇 잔의 술로 대신하는
나름대로의 재주가 있을 뿐
우리에겐
텔레비전이나 소문에 묻어 오는 자유가
전부였습니다
실직한 청년들은 밤새
금이 간 남의 집 벽에다
낯 뜨거운 사랑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쓰러지고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그래도 아침이면
어느새 능청스러운 햇살이
방 한가운데 들어와 있기도 했습니다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 정릉 명호 호프집에서 / 강세환
홍은동 산 1번지 무허가 블록 집으로
묵직한 달빛이 고개 숙이고 들어가고
김관식이 들어가고
신경림이 들어갔다
어두운 골목까지 따라오던 긴 그림자 하나 담벼락에 붙어 있다
가난한 시인의 집 마당 술 취한 발자국들을
시인의 아내가 거둬들이고
시인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퍼 올린 슬픔도 거둬들이고
김관식에 이끌려
조지훈과 미당 댁에 세배 다녔다는
함박눈을 비틀비틀 밟으며
자정 넘어 들렀어도
큰 술 꺼내놓던 미당의 환호작약!
큰대자로 김관식은 숙면에 들고
미당의 술자리는 더 길어지고
무명 이불을 덮어주듯 함박눈 내리던 날이었다
시간 저편의 아내에게 머리를 누인 듯
신경림 선생의 추억은 행복하고 또 슬프다
함박눈은 오늘도
가난한 아내와 살던 산 1번지를 덮고 또 덮고 있으리라
함박눈처럼
다 흩어지고 또 남겨진 것들
"오백 하나 더!"
"오백 하나 더!"
- 강세환, 『앞마당에 그가 머물다 갔다』 (실천문학사, 2015)
■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 신경림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 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삶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묻혔다
집에서 언덕밭까지 다니던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
마을길을 지나 신작로를 질러 개울을 건너 언덕밭까지,
꽃도 구경하고 새소리도 듣고 물고기도 들여다보면서
고향살이 서른해 동안 어머니는 오직 이 길만을 오갔다
등 너머 사는 동생한테서
놀러 오라고 간곡한 기별이 와도 가지 않았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미군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본 것 수천배 수만배를 보면서,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24(일)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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