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정류장에서' 강호형 (2021.10.22)

푸레택 2021. 10. 22. 20:11

■ 정류장에서 / 강호형

첫눈이 함박눈이면 공연히 마음이 들떠서 아무 할 일이 없어도 분주해진다. 펑펑 쏟아져내리는 눈송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근거도 없이 어디엔가 좋은 사람,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겨울 가뭄이 심하여 함박눈을 고대하고 있던 참인데, 추적거리던 겨울비가 진눈개비로 변하고 있었다.

퇴근버스에서 내리니 정류장에는 마중나온 사람들로 때아닌 우산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귀가하는 시각이 일정치 않은 나에게 마중나온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반갑게 맞이하는 정경들이 부럽기도 하여 혹시나 하고 한 차례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아침에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내일이 휴일인 데다가 마침 집안 어른의 생신이라 아이들 데리고 먼저 갈 테니 저녁은 음식점에서 때우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술잔이나 기울이다 보면 따로 저녁을 먹는 날이 드물었고 그것이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주위에는 마땅한 음식점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섰다. 그렇게 궂은 날은 포장마차가 제격이기도 하다.

40대의 안면 있는 주모가 안주를 굽는 동안 나는 정류장 풍경을 내다보고 있다. 버스가 멎을 때마다 작은 소동이 인다. 화장기가 고운 새댁이 키가 훤칠한 청년을 맞아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 종종걸음을 친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어 웃음이 절로 났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섰던 노파는 손녀인 듯한 여학생을 데리고 가고, 권태롭게 하품을 날리던 중년 여인은 술취한 장년에게 여벌 우산을 넘겨주고는 횡하니 앞장서 가버린다. 술취한 장년의 거동이 나의 몰골을 보는 듯했다. 아들을 맞는 어머니, 아버지를 맞는 딸…… 모두들 된장찌개가 끓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려니 하는 생각에 나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안주가 타겠다는 주모의 채근에 소주잔을 기울이면서도 나는 자꾸 정류장 쪽으로만 시선을 보냈다. 아까부터 전주 밑에 연잎처럼 덮여 있는 파란 우산 하나가 마음에 걸리던 것이다. 우산 속에는 오누이인 듯한 어린 소녀와 소년이 쪼그리고 앉아 먹이를 기다리는 제비새끼들처럼 목을 길게 빼고 버스가 나타날 쪽을 바라보고 있다. 몇 대의 버스가 더 지나가고 정류장에는 인적도 뜸해졌건만 아이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좀체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럴수록 나는 아이들이 맞이할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셨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다. 과한 줄 알면서도 한 병을 더 시킨다. 나의 거동이 이상했던지 주모가 포장을 들치고 밖을 내다보더니 낭패한 표정이 되어 뭐라고 아이 이름을 부른다. 아이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주모를 본다. 주모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아이들이 포장마차에 들어서기를 기다려 주모는 펄펄 끓는 국 속에서 꼬치안주 두 꼬치를 건져 아이들 손에 하나씩 들려 준다. 예쁘고 똑똑하게 생긴 아이들이었다. 두 아이가 ‘고맙습니다.’를 합창하고는 더운 김을 후후 불어내며 그것을 먹고 있을 때 버스가 와 닿고 이어 큼직한 고무 함지박을 든 여인 하나가 내렸다.

“엄마다!”

두 아이가 동시에 소리치며 내닫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생기가 있고 신선했던지, 잠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던 나까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꾸지를 않아서 그렇지 차리고 나서면 미인 축에 들 한창 젊은 여인이 포장 안을 기웃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아이들을 거느리고 총총히 사라지자 주모가 혀를 끌끌 찼다. 남편이 암을 앓다가 가산마저 탕진하고 지난봄에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술 기운이 꽤 올랐는데도 왜 그런지 나는 자리를 뜰 기분이 아니었다. 남은 술을 마저 마실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건장한 노인 하나가 들어섰다. 노인은 주모와는 구면인 듯 인사를 나누며 앉을 자리를 찾았다. 나는 화덕 앞을 조금 비켜나며 노인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남은 술도 없앨 겸 잔을 넘겼다. 그것이 ‘발동’을 건 격이 되어 남은 술은 말고도 두 병인지 세 병인지를 더 마시고 만취가 되어 노인과 손을 흔들며 헤어졌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노인의 이야기에 취한 기분이다.

고향은 진남포, 나이 30에 장가를 들어 임신 3개월의 꽃 같은 색시를 두고 왔다. 근동에 소문난 미인이 아내가 된 것이 믿어지지 않아 잠이 깨면 안아보고, 눈을 감고도 더듬어봤다며 껄껄 웃었다. 길어야 한두 달이겠지 하고 헤어진 지가 30여 년. 잠시도 잊은 적이 없고 잊으려 해도 잊히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쁜 색시를 두고 오셨으니 새장가 드시겠어?”

주모는 이미 내력을 알고 있는 듯 거들고 나섰다.

“중매두 숫태 들어왔시오. 해두, 자꾸 갸 얼굴이레 눈에 밟혀 차마 못 하갔는 걸 어득합니까?”

이산가족 찾기 할 때 찾아보았느냐니까, 왜 안 해봤겠느나며 도민회로, 군민회로, 오도청으로 안 다녀본 곳이 없지만 소용이 없더라며 훌쩍 술잔을 비웠다.

다시 만나면 잘 살아보려고 죽자하고 돈도 모아 집세만 받아도 먹고 살만한데 언제 만날지 안타깝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그러지 마시고 내 참한 과수댁 하나 중신할 게 장가 드셔.”

주모가 부추기니까 노인은 번쩍하는 눈으로 주모를 한 번 노려보고는 이내 표정을 누그리며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은가락지 한짝을 꺼내 보였다.

“이걸 한 짝씩 나누어 개디고 헤어지며 꼭 돌아오마구 약속을 했지요. 내래 이놈의 가락지 한 짝을 안구 반 평생을 살어온 놈이요.”

주모가 슬그머니 돌아서며 콧물을 훔쳤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노인의 눈에도 물기가 배인 것 같았다.

밤이 깊었다. 밖에 나서니 진눈개비는 그새 함박눈이 되어 펄펄 흩날리고 있다. 차도를 가로질러 건너편 불빛 속으로 들어서는 노인의 구부정한 어깨 위에 나비 같은 눈송이들이 쉴새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윽고 노인의 모습도 눈발 속으로 사라지고, 텅 빈 정류장에는 나 혼자 함박눈을 맞고 서 있었다. 함박눈을 맞으면서도 나는 아무도 기다릴 사람이 없을 집을 생각하며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다.

글=강호형 수필가

/ 2021.10.2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