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초꽃 핀 언덕 / 박영수
중앙공원 은행나무 그늘에 초로(初老)의 남녀가 서 있다. 천천히 다가가는 나를 향해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보낸다.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축복인양 눈부시다.
세월의 강을 건너가듯 뚜벅뚜벅 그녀 앞에 선다. 사이버 공간에 들어선 느낌이다. 너무도 변해 있을 얼굴 쪽으로 차마 시선을 주지 못하고 손을 잡는데 옆에 느껴지는 인기척. 그녀의 남편이다. 그토록 만나지 않겠다고 버티던 부인을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고마운 사람. 중후한 인품의 덕스러운 얼굴이다. 공손히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며 통성명을 한다. 40여 년만의 재상봉이다.
순백의 소년시절. 고향마을에서 냉랭한 모습으로 멀어져간 꿈의 표상. 가슴깊이 간직되어 있던 그 소녀를 첫사랑이라 부를까. 아니 나 혼자서 애를 태웠으니 짝사랑이라 할까. 지금 그 여인이 내 앞에 서 있다. 잊고 살아온 세월은 그렇다 치고 어렵사리 전화통화까지 이루어지고도 세 해를 더 넘긴 후에야 이루어진 만남이다. 오늘은 내 인생에 다시없는 축제의 날이라 할까.
6.25 전란통에 북에서 피난을 왔던 소녀의 해맑은 얼굴과 가녀린 어깨선은 그 무렵 마악 사춘기에 접어들던 소년의 마음에 파문을 던졌다. 바보스럽게도 소녀 앞에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가슴만 콩콩이던 소년은 그녀가 서울로 훌쩍 떠나고 나자 강물처럼 일렁이는 그리움을 감내하지 못해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소년은 동구 밖 언덕에서 먼 하늘로 떠가는 흰 구름 만 쳐다보곤 했다.
세월이 마구 흘렀다. 아들 딸 낳아서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이마에 주름살이 각인되던 이순(耳順)에 이르러. 까맣게 타버렸던 불씨 하나가 꿈틀거렸다. 서울의 어느 예식장 입구에서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중학친구가 넌즈시 귀뜸 하는 말.
"야. 옛날에 니가 좋아했던 아무개 있지? 지금 식장 안에 와 있어."
"뭐. 누가?"
갑자기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대했던 만남인가. 발길이 떼어지지가 않아 무작정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옛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서로 몰라보고 그냥 지나쳤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묘한 구석이 있다. 그날 예식장에서 자연스레 마주쳤다면 다소 놀라기는 했을망정 마음의 동요는 없을 일이었다. 문제는 우연히 만날 뻔하다가 만나지 못한데다 중학 동창을 통해 차 한 잔의 만남을 청했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보니 슬그머니 오기가 발동하고 말았다. 늙어가는 마당에 무슨 내외냐. 잘난 체 좀 하지마라. 하면서 편지 한 통을 바람결에 띄워 보냈더니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전화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내가 한번 만나자는 제의를 번번히 거절했다.
전화로 만나면 그만 아니냐는 거였다. 공교롭게도 읽어보라고 권한 피천득 수필 '인연'이 발목을 잡았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난만 못하였다' 는 한마디가 그녀 마음을 꼭 붙잡아 맬 줄이야. 여기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남편인 윤사장이었다. 그는 언짢아 하기는 커녕 우리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름답게 이해하고 아내에게 진심으로 만남을 권유해 주었다. 그래도 요지부동이었다. 윤사장은 내게 연민의 정을 느꼈던지 위로 편지까지 보내 주었다.
'집사람이 박형을 만나지 않으려는 것은 다른 뜻에서가 아니라 혹여 박형의 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까 하는 점이고. 두번째는 내자가 아직도 처녀시절의 공주병이 남아있기 때문이니 그렇게 알고 양해해 달라'며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해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옛날 함께 거닐던 '추억의 언덕'이 우리를 불러 내고야 말았다. 그녀가 그린 추억의 편린이 철옹성의 빗장을 풀게 한 것이다.
윤사장으로 부터 아내의 유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슬쩍 가보라는 전화를 받고 찾아간 인사동의 한 미술관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낯익은 그림 한점이 나를 반겼다. 거기 추억이 서린 고향의 냇가 언덕 망초밭이 되살려져 있었다. 그녀와 나만이 알고 있는 언덕 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작품과 마주 하고 서서 있었다. 청주에 오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 사흘 뒤였다. 남편이 그림 한 점 전해주려 간다기에 자기는 망초꽃 핀 언덕이나 보려고 동행 한다는 것이었다. 고집을 접은 핑계가 그럴싸했다.
신록 속으로 차를 달린다. 고향마을도 지나고 함께 다니던 학교 앞도 지난다. 추억의 냇가 언덕은 눈을 뜨면 보이지 않고 눈을 감아야 보일 법 했다. 온통 연두빛 물감을 부어놓은 5월의 산하는 세월의 벽을 넘어 우리들 마음을 열어 주기에 충분했다. 화양동에서 선유동을 돌아 나오다가 할티고개에서 차를 멈춘다. 이국적 분위기의 찻집.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2층 창가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놓고 신문을 뒤적이던 윤사장이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옛 친구들만의 대화시간을 주려는 배려임에 틀림이 없다.
"역시 오길 잘했어요."
단발머리 소녀로 기억하고 있을 내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컷던 그녀는 진심으로 반기는 나의 모습에 무척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기억 하고 있던 옛 모습은 물론 아니었으나 꿈이 깨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로의 살아온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너무도 맑은 영혼이 감동으로 전해져 옴을 느꼈다. 오랜 신앙생활에서 밴 사랑의 향기가 세속에 찌든 내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헹구어 주는듯 했다. 밖을 내다보았다. 망촛대 언덕은 거기도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멎은 그 자리에 앉아 연초록의 초원을 망연자실 내다보며 일어날 줄을 몰랐다. 윤사장은 차안에서 쉬고 있었다. 찻집을 나오면서 보니 '연어가 돌아올 때' 이름조차 우리의 만남을 축복해 주는듯 했다.
유화[망초꽃 핀 언덕] 전달식은 아내와 친구내외 두 쌍이 더 합석을 한 만찬석상에서 있었다. 윤사장이 박형의 수필집을 감명 깊게 읽고 답례로 그린 그림이라고 소개말을 덧붙였다. 아내는 처음에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대화가 무르익으면서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그들 내외는 시부 간병에 찌든 아내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자상함도 보여주었다. 몇 순배 잔이 돌자 한 친구가 "애인끼리 함께 앉힙시다." 며 짖궂게 나왔다. 나는"내 애인은 이쪽이 인데요." 하며 아내 옆 자리를 고수하자. 또 한 차례 폭소가 물결쳤다.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자리임이 분명했다.
집에 돌아오자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 하나를 끝낸 것 같은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첫사랑 타령 끝도 없이 하더니 어때요? 좋아요?"
기분이 나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날 밤 잠이든 아내 옆에서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글=박영수 수필가
/ 2021.10.2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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