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번지의 골목 / 김명수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산비탈 언덕바지 슬레이트집들 사이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보고 방긋이 웃어주는 계집애야
아버지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머니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하루종일 뛰어노는 계집애야
네 어머니 저 아래 난전바닥에서
쌀 한 말어치도 안되는 좌판을 벌여놓고
하루종일 먼지 속에 사는 것을 나는 안다
온종일을 배고프게 혼자 놀아도
때묻은 손 그 흔한 인형 하나 못 가지고
돌멩이 사금파리 주워 노는 계집애야
네 어머니 밤늦게 너를 찾아와도
너는 지쳐서 먼저 잠들고
네 아버지 공사장에서 밤늦게 돌아와도
너는 먼저 지쳐서 잠이 드는 아이야
삶에 지친 이 골목 가난한 어버이는
네 웃음 하나뿐인 위안으로 여기며
서러운 하루를 희망으로 산단다
하느님도 외면한 가난한 이 동네에
때묻은 얼굴의 조무래기들아
그래, 웃어주려무나
웃기라도 하려무나
너희라도 이 골목에 웃어주지 않는다면
가난한 우리 마음 얼마나 서러우랴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산비탈 언덕바지
슬레이트집들 사이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방긋 웃는 계집애야
네가 웃어 우리 마음 서러운 계집애야
네가 웃어 눈시울에 눈물 어릴 계집애야
- 김명수, 『피뢰침과 심장』 (창작과비평사, 1986)
■ 청량리 황혼 / 허연
- CANVAS에 유채
이따금씩 피를 팔러 가기도 했습니다
카스테라 한 봉지씩 사들고
지하 주차장에 모여 노래를 부를 때면
언제나 제일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건
지하도 입구에서 구두를 닦던
혼혈아 경태 녀석이었습니다
애써 보이려 하지 않아도 우리들의 가난과
짝사랑은 속살을 비집고 나와
찬 바닥에 나뒹굴곤 했습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믿던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누가 그었는지 우리들의 기억 속엔
붉은 줄이 하나 둘씩 지나가 있었고
시장 골목에서 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어느새
그것들을 용서했습니다
시대극장 앞 길
유난히 눈길이 자주 마주치던
조그만 창녀 애를 구해 내는 꿈을 꾸다 잠이 깨던
제기동 자취방
눈이 많았던 겨울이었습니다
나 혼자 용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중국집 구석방에서 녀석들은 나를 끌어안았습니다
희미한 알전구 속에서 흘러내리던 눈물
우리가 미친 듯 소리를 질러 대던
무심한 하늘에선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겁이 많던 경태를
서울 구치소에서 면회하고 돌아오던 날
우리는 문신을 새겼던 가느다란 팔목을 확인하며
버리고 싶어도 땅끝까지 따라오던 날들과
그 거리를 떠났습니다
몇은 지원병이 되어
몇은 직업훈련원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어깨를 누르고 있던
어디에도 없는 내일로 떠나며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는 텔레비전처럼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 지상의 방 한칸 / 이시영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크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 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칸.
- 이시영, 『은빛 호각』 (창비, 2003)
■ 왕십리 / 이시영
왕십리 하면 야간수업을 일찍 마치고 나와 왕소금을 뿌려가며 구워먹던 좁은 시장통의 그 대창집이 생각난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면서 심야의 아스팔트길을 가르며 나아가던 심선생의 날렵한 오토바이도. 그는 단축수업을 너무도 좋아하는 Y고의 2부 주임. 4교시가 끝나갈 무렵이면 수업시간표가 빼곡한 칠판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백묵을 들고 교감선생에게 달려가 단축수업을 건의하던 그의 그 생글거리던 소년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왕십리 하면 또 어둑한 교무실을 밝혀주던 따뜻한 배선생이 생각난다. 늘 남의 숙제를 대신 해줄 것 같은, 웃을 때면 콧잔등에 잔주름이 많이 접히던 여자. 무슨 일인가로 면목동에 갔다가 허름한 여관에 들어 새우처럼 서로의 등을 오그리고 자던 통금의 밤이 생각난다. 이튿날 함께 결근을 하고 대낮의 긴 골목길을 걸었던가. 아, 또 생각난다. 수학 이선생, 체육 오선생이랑 여럿이서 알 수 없는 열기에 들떠 달려갔던 남이섬의 겨울밤들. 얼어붙은 겨울 강에서 얼음을 지치면서 우리는 늑대처럼 울부짖었지.
왕십리. 어딘가에서 버림받고 왔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보다 먼저 이마가 달아오르던 시절의 우리들의 거처. 밤새도록 헤매이고 이튿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업에 들어가곤 했지만 늘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함 있지? 그러나 그때 우리 나이는 겨우 스물넷. 바람 부는 벌판으로부터 어서 떠나고 싶은.
- 이시영, 『은빛 호각』 (창비, 2003)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24(일)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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