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공덕동 풍경' 고광헌, '아현동 블루스' 박소란, 'post- 아현동' 안현미 (2021.10.24)

푸레택 2021. 10. 24. 12:15

■ 공덕동 풍경 / 고광헌

새 아파트 단지에 갇힌
오랜 골목길 재개발구역
키 낮은 불빛들 발길에 차인다

어느 가족의 늦은 저녁식사도
귀갓길
무릎 아래
사선으로 찍힌다

반지하
반쯤 수평으로 그어진 창밖 화분들

화분에서
자라는 분꽃 모가지들
잎 꾹 다물고
우린 밥 먹었다는 표정이다

재개발 붉은 숫자들
깨진 암호처럼
담벼락 여기저기 어지럽다

- 고광헌, 『시간이 무겁다』 (창비, 2011)

■ 아현동 블루스 / 박소란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쇼윈도우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살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라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벌
쇼윈도우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 박소란,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 post- 아현동 / 안현미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아주 춥던 방,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다' 어둡고 낡은 나무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스레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 안현미,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24(일)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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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매일 답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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