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내 친구 박원택' 정병근, '박득세' 곽재구, '허상진' 전성호 (2021.10.17)

푸레택 2021. 10. 17. 16:44

 

◇ 내 친구 박원택 / 정병근

그라면 말할 수 있다
불알 두 쪽 차고 서울 올라와
구두를 닦다가 자장면을 나르다가
쇠를 지지다가 전기 기술자가 된 사연,
안 해본 일 없는 그의 손을 보라
절삭기에 썩둑 잘린 오른손 인지 끝이 부끄러워
사람과 악수할 때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왼쪽 손등에는 전기 스파크에 데인 자국
팔뚝엔 담뱃불로 지진 흔적 선명하다
그는 대체로 잘리고 데이고 지지면서 살았다
운명의 불똥이 그의 몸을 몇 번씩이나 뚫고 지나갔다
견디다 못한 아내가 도망가자
그는 아이들을 복지원에 맡겨놓고
설비 회사 바닥에서 혼자 자고, 밥 먹는다
내 친구 박원택이라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수줍게 웃으면서 술잔 비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술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칠 수 있다

- 정병근, 『번개를 치다』 (문학과지성사, 2005)

◇ 박득세 / 곽재구

- 동명동 청소부

쓰레기 덮인 세상
지우며 사는 일은 얼마나 다사로운지
오늘도 새끼로 감발 치고 눈 내린 새벽길 걷는다
청국장밥 한술에 만 신새벽보다
마음 밖이 더 추운 세상인데
오늘은 영하 칠도 그것이 무슨 추위냐며
김이 나는 쓰레기더미에 삽을 꽂는다
생각하면 한세상 버리기 쉬운 쓰레기와 같은 것을
일찍 깬 뽕뽕다리 건너 전파상에서는
흘러간 시절의 뽕짝 몇 구절도 쓰레기통에 담아오고
눈 쌓인 털모자 다시 털어 써도 눈사람 된다
에헤라 노래나 부르랴 지나간 시절 가슴 저려오는데
에헤라 손장단 맞추랴 떠나온 고향 돌아갈 수 없는데
고개 들면 들기러기 조각달 물고 가는 여기는 탸향
남녘이라 인심 좋은 광주에서도 삼수갑산
내 고향 그리운 마음 삼십년이 하루 같네
서러웁지나 않을까 상것도 저 죽으면 향천에 발뻗는데
흰 눈은 상기 펑펑 쏟아지고
돌아갈 수 있는 마음조차 얼어붙어
어머니의 무덤 곁에 저무는 고향 강을 지켜보지 못한다면
쓰레기를 버리는 아낙들도 오늘은 고요하여 말수가 적고
불켜진 낮은 창마다 잊혀진 옛얘기들이 새어나온다
어서 가자 담배 한 모금도
뜻 깊게 빨아야 할 세상이 온다면
이 새벽 오랜 타관길 외롭지 않으리
덜컹대는 쓰레기차 타버린 연탄재와 나란히 앉아서
떨어진 한세상 붙여주며 눈 맞는 일
지금은 고요하여 언 가슴에 노래나 지피리.

​- 곽재구, 『沙評驛에서』 (창작과비평사, 1983)

◇ 허상진 / 전성호

춘삼월 아직 촉촉한데
바람 한 무더기 쓸고 간 웅상병원 뒤뜰
포곡새 한 마리 날아간다
대운산 골짜기를 내려서는 바람
네 집 창밖 여윈 소리 따라
세상 너머로 간다

움 솟는 연초록 눈부신 산야
향불 따윈 부질없는데
미친 듯 봄 햇살 떠도는 회야강
오리소 버들강아지들
젖은 입술을 비벼대는데
정 깊은 서창 땅 울지 않는 새들처럼
꽉 묶인 하늘
아직 끝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대책 없이 앞뒤 산만 완강하구나

상진아! 느닷없이, 쉰둘에
어디로 떠나느냐
우리는 몸에 감았던 정도 주먹다짐도
다하지도 못했는데
너 불편한 몸 끌고 어딜 가느냐

산 것들은 왜 언제나 이리도 염치없는지
왜 이리도 부끄러운지

상진아, 그놈의 꼽추가 뭔 원수길래
한없이 너는 울고
우리는 허기진 배에 칡뿌리를 씹었느니
입가 꺼멓도록 웃었다
지기 싫어했던, 네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니가 살던 아파트 창을 올려다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구나
잘 가던 흙다방도 술집도 변해
캄캄한 불가마뿐이구나

사소한 웃음 한 번으로 우리를 간단하게
묶고 풀던 친구야 길에 박힌
돌부리같이 서창 땅에서만 살다 간 상진아
서창슈퍼 옆 옛집으로 돌아오거라
흘러가다 가다 지치면
이곳 연호 마을 작달비로 다시 쏟아지거라
낮은 구름으로 찾아와
집 앞 개난초라도 적셔주거라
돌아와 내가 잠들었거든 잠든 내 코를 내질러 네가 온 것을
알려주거라.

- 전성호,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실천문학사, 2015)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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