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김씨' 정희성, '벽 너머 남자' 김해자, '​李씨의 눈' 김명인 (2021.10.17)

푸레택 2021. 10. 17. 16:12

◇ 김씨 / 정희성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의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 벽 너머 남자 / 김해자

가끔 공동 수돗가에서 만나면 사알짝 웃기도 했는데, 마당 끝에 있는 변소 앞에 줄 서 있기라도 하면

출근길 그 남자 미안한 듯 고개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느 차가운 밤 골목 입구에서, 고구마 냄새나는 따뜻한 비닐봉다리 안겨주고 도망가기도 했는데, 충청도 어디 바닷가에서 왔다던가 사출공장 다닌다던가

기침 소리, 라면 냄새 다 건너오던 닭장 집, 얇은 벽 너머 함께 살았지. 벽 하나 사이 두고 나란히 누웠던 그 남자 느닷없이 죽어, 하얀 보자기 씌워져 실려 가고서야 알았지. 세상에 벽 하나 그리 두터운 줄 벽 하나가 그리 먼 줄

말이나 해보지, 벽이나 두드려 보지, 죄 없는 벽만 쥐어박다 손때 묻은 벽 앞에 제상 하나 차렸다네. 고봉밥에 무국 고사리 도라지나물 해서 떡 사과 배도 얹고, 밥상 걸게 바쳤다네 이왕 가는 길 힘내서 가라고, 그 겨울 내내 벽 앞에 물 한 그릇 올렸다네

추석이 낼 모레, 십이야 고운 달빛 아래
마른 고사리 데쳐놓고 도라지 흰 살 쪼개며
삼십 년 되어가는 옛 이야기 풀어놓는 여자

웃어나 줄 걸 따듯하게 손이나 잡아줄 걸
그까짓 여자남자가 뭐라고 죽고 나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그까짓 게 다 뭐라고

그 때 그 더벅머리 어미뻘 되어가는 여자
나잇살 차곡차곡 채워가며
산골짝 처녀귀신으로 늙어가네

- 김해자, 『해자네 점집』 (걷는사람, 2018)

◇ ​李씨의 눈 / 김명인

도선사나 되어야겠다며 李씨,
파도 차가운 물에 녹슬어 취한 얼굴을 씻고
이곳 떠나 배운 짓 달리 없으니
통일 되면 남 먼저 고향에 가서
돌아오는 배들이나 제 손으로 끌어 보겠다더니

李씨, 오십 줄에 벌써 눈 흐려지니 틀렸다고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도
별수 없이 옛집 어귀에 술장사나 차릴 도리라고
요즈음엔 부쩍 수척해져서
꿈에 낯익은 모습을 보게 되니 웬일이냐고 묻던

며칠째 李씨, 이곳에서 볼 수가 없고
구석진 선술집 허름한 좌판 위에도
오늘은 철늦은 눈이 날린다 내리면서 눈은
부두의 경계 이쪽 저쪽으로 갈라져 쌓이며 스러지는데
어느 진창길에 곤두박혀 그의 평생도
더러 쌓이고 소리 없이 스러졌는가?

잠시 머물 눈도 어깨에 지니 사는 것 저려 오고
날리는 것들만 아득해서 천지
가려 놓으니
그 너머 어디쯤에 고향은 활짝 개어 있을는지
李씨여, 내리는 동안 서로 얼굴 비벼대도 떨어져선
파도에 묻혀 흔적 없는 우리도 눈이겠거니
땅에 쌓이는 것도 곧 녹아 저렇게 눈물이 되는구나

- 김명인, 『東豆川』 (문학과지성사, 1979)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7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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