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호 / 전윤호
유호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선생님 아들
강돌처럼 작고 똘똘했지
길바닥이 뜨거운 여름이면
다리 밑에서 종일 함께 헤엄을 쳤어
남과 싸우지 않고
괴롭히지도 않는 모범생
어느 날 아침 수업이 시작됐는데
유호 책상이 비어 있었어
우리가 집으로 돌아온 저녁까지
학교에 가야 하는 아침까지
강에서 나오지 않은 거야
벌거벗고 헤엄치던 아이들은
그때부터 조금씩 강을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었지
학기 중에 이사 간 선생님처럼
고개 숙이고 떠나간 누이들처럼
세상은 이제 친구가 아니었어
하지만 난 함부로 떠들어댔지
무덤이 없으니
그놈도 도원으로 마실 간 거라고
저물녘이면 마지막으로 함께 놀았던 여울에서
두 손을 모아 이름을 외치면
벼랑에서 벼랑으로 왜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 전윤호, 『늦은 인사』 (실천문학사, 2013)
◇ 실업자 고만석 / 김진완
비정규직으로 뺑이 치다
ㅡ우리가 늬덜 봉이네? 홍어 좆이네?
호기 부렸다가 덜컥, 짤린 호구
ㅡ업을 잃었으니 해탈이 당연지사
옥탑방에서 골똘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허무주의자
가뿐하게 저승 땅에 착지할 자신은 없는 소인배
비키니 옷장까지 들춰서 동전 주워 모으는 알뜰파
라면 한 개로 소주 두 병을 까야 하는
서운 막심한 세상
칼바람에 들뜬 섀시문과 함께
으드드드 치를 떠는 더운 피 생물
ㅡ어매야 아배야 배고파 죽겄다아 만석꾼 되라던 당신네 아들 만석이가 석 달 넘게 배를 곯는다아
- 김진완, 『모른다』 (실천문학사, 2011)
◇ 개옻나무 종만이 / 이봉환
가을바람 불면 누구보다 먼저 수줍던
개옻나무를
아무도 눈여겨봐주지 않았지
냄새 난다고 킁킁거리고 옻오를까 봐
흠칫 경계하며 친구들 저만치 피해만 다녔지
홀어미의 가난 밑에서 겨우 구구셈이나 마치고
돈벌이 떠난 국졸이 최종 학력인 동창생 종만이
늘 간이나 보고 마음은 통 안 주는 도회 사람들 틈에서
소똥 개똥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굽실굽실 막일해댔지
쓰레기 매립장 척박한 땅에 악착같이 뿌리내렸지
삼십 년 바지런히 트럭 몰아 산지사방을 휩쓸고
그 사이 다복다복 이룬 잡목 숲에서 고라니 새끼들이 뛰고
아내는 단 한 푼도 금쪽 마냥 쟁여 모았지
오십 다 된 나이에 추석 쇠러 불쑥
고향에 나타난 개옻나무 종만이
동네 어르신들 잡수시라고
즐겁게들 먹고 노시라고
맥주와 소주 한 상자에다가 돼지 한 마리 내놓는다
연신 술을 따르며 귓불 벌게진
개옻나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네 어른들을 대접한다
모처럼 저도 고향에서 사람대접 한번 받는다
그려, 그려, 종만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먼
아들 딸 낳고 집 장만하고 훌륭히도 장성했구먼
- 이봉환,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사, 2013)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7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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