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경님 / 곽재구
늦은 밤 남면 가는
시외버스 차창에서
고단한 네 하현의 눈썹을 보았구나
봉숭아 물든 손톱 너머로
고향집 마당 가득 푸른 하늘은 펼쳐 있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 억새밭 위로
희게 웃는 식구들의 얼굴도 보이겠지
감잣대를 엮어 말리는 엄마 곁에서
동생들은 또 지난 여름 산사태를 생각할까
흙더미에 묻힌 아버지와 막내
자갈길에 버스는 자꾸 퉁겨오르고
그때마다 깜박 깨어나는 네 졸음 속으로
덧없는 한 시대의 어둠과 슬픔은 밀려가고
차창 밖 어둠 속에 꽃을 던지는
마을의 도라지꽃 불빛이 스스럽다
여느 밤 충장로 거리에 나서면
가시내들은 엉덩이를 부풀린
목 짧은 바지에 퍼머넌트 히히덕거리고
무슨 잭슨 플록이다 카라얀이다 요란하지만
경님아 그것들이 지닌 영혼은
밤 버스에 깜박깜박 조는
고단한 네 일상의 눈썹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들이 떠들어 대는 피아노 협주곡은
오라잇 하는 네 발차소리보다 정직하지 못하고
그것들이 떠드는 무슨 비구상파 그림들은
네 손톱 끝 연연한 고향 하늘
봉숭아 빛 꿈보다 깨끗하지 못하다
늦은 밤 버스는 논길인 듯 고향 꿈길인 듯
졸며 흔들흔들 떠나고
네 졸음 틈틈이
땀 절은 동전 몇 개를 건네주고 내려서는
저 힘없는 사람들의 뒷등이 따스하다
- 곽재구,『沙評驛에서』(창작과비평사, 1983)
◇ 영숙이 / 문성해
나를 거쳐간 이름 중에는 유독 영숙이가 많다
중학교때 간질을 앓던
내 의자를 붙들고 안 넘어가려 애를 쓰던 내 짝 영숙이와
고등학교 때 담을 같이 쓰던 이웃집 영숙이와
그 애 집에 놀러갔다 영숙이 몰래 내 머리를 빗겨주던 그 영숙이 오빠와
결혼해서는 죽어라 일만 하다 어느 날 불쑥 절에 들어간 영숙이와
이즈음은 김포에서 내게로 두 시간이나 차를 타고 와서는 시를 배우고 가는
혈색이 안 좋은 나더러 사슴피를 마셔보라는 사슴 목장 주인인 영숙이도 있다
영숙이들은
서늘한 눈매와 다부진 입꼬리가 어딘가 닮아 있고
어느 땐가는 이들이 한 인물들 같아
내 과거를 다 안다며 불쑥불쑥 증거를 들이밀 것 같고
나는 앞으로 그 이름 앞에서는 정직해져야만 할 것 같고
한결같아야만 할 것 같고
앞으로 두어 명의 영숙이면 이번 생도 끝물이란 절망에
낯선 이들을 알기조차 꺼려진다
이 밤 영숙이는 또 어떤 이름과 밤을 나누는가
성도 얼굴도 다른 그이들이
몸에 영숙이를 담고 와서
내게 웃음과 주름을 주고 갔음을 생각하는 밤
나는 살아 영숙이와 나눈 끼니 수와
같이 보낸 밤의 수를 헤아려본다
그리고 먼 은하수 물결처럼 흘러갔을 영숙이들과
이 땅에서 내가 끝내는 못 만나고 갈 수많은 영숙이들도 생각한다
- 문성해,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학동네, 2016)
◇ 우리 동네 구자명씨 / 고정희
ㅡ 여성사 연구 5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 든 한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 고정희,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87)
◇ 조아라를 기억해주셔요 / 박태일
제 한국 이름은 조아라
저는 좋아요 올랑바트르 대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지어준 이름
나릉톨 시장 들머리서 한국인 관광객이 냄새난다고 말하자
이러러면 몽골에 왜 왔어요 벌떡 얼굴을 세워
눈물을 찢어대던 저를 기억해 주셔요
약혼 뒤 한 해 내년에 혼인하면
쌍둥이를 낳겠다던 스물아홉
다음 올 때는 호텔비 아껴 자기집에 머물라는 조아라
좋아할 것도 없을 한국인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벡지 웃음을 접어주던
그녀 땅콩 까부는 듯한 말소리
- 박태일,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 (문학동네, 2013)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7(일)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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