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버스 /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 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이는 시골 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니,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풀풀 날리며 한참을 지나쳤다 투덜투덜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 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 올린 포플러와 내가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2010)
◇ 어떤 통화 / 박성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정읍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에 오르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닮은 노인들 몇만 듬성듬성 앉아 있다 안전벨트 안허면 출발 안헐 팅게 알아서들 하쇼잉. 으름장 놓던 버스기사가 운전대를 잡는다
차가 출발하기 무섭게 휴대전화 소리 들려온다. 어 넷째냐 에미여 선풍기 밑에 오마넌 너놨응게 아술 때 쓰거라잉, 뭔 소가지를 내고 그냐, 나사 돈쓸데 있간디
버스는 시큰시큰 정읍으로 가고, 나는 겨울에도 선풍기 하나 치울 곳 없는 좁디좁은 단칸방으로 슬몃슬몃 들어가본다
- 박성우, 『자두나무 정류장』 (창비, 2011)
◇ 강화운수에서는 아직도 담배를 피누나 / 박철
시외버스는 아직도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구나
누구 하나 탓하는 이 없다
서울 사는 자식들 먹여살리느라
올려보내는 온갖 반찬 냄새
차 안을 휩쓸고 기름 냄새 가득하다
거친 운전사의 운전 솜씨나
침을 튀기며 나누는 인사말이
세상 바뀌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저번 잔치에 못 간
부줏돈을 건네주기도 하고
또 비틀거리며 마다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학생들의 눈빛으로 하는 연애가
숨막힐 듯 날렵한 실내
어미가 비닐봉투를 얻어다가 아이의 등을 두드리고
휴가 가는 군인의 들뜬 기분이 손에 잡힐 듯한데
강화운수는 아직도
차 안에서 담배를 피누나
- 박철, 『새의 全部』 (문학동네, 1995)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5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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