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누이 / 김명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 먹돌 / 이홍섭
일곱 살쯤 되었을까
툴툴거리는 버스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어느 먼 곳으로 가는 길
오지의 간이 정거장에서
버스가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급히 옥수수 두 개를 사오셨는데
어린 나는 무슨 심술이 났는지
끝내 그 옥수수를 먹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로부터 사십 년이 흘러갔건만
막막해 하시던 아버지의 표정을 닮은
먹돌 하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
멈추어서 줄곧 나를 따라오고 있다
- 이홍섭, 『검은 돌을 삼키다』 (달아실출판사, 2017)
◇ 해남행 완행버스 / 이창수
해남행 완행버스를 기다린다
제 시간에 오지 않는 버스를 탓하며
설탕 맛으로 커피를 홀짝거린다
하나둘 빈자리 찾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무거운 짐을 싣고
마른 담뱃잎 같은 혀를 내밀고 잠에 든다
앞 유리창에 소망하는 마을의 이름을 달고
어눌한 표정으로 길 떠날 차비 꾸리는
해남행 완행버스
느릿느릿 목적지도 없이 길 떠나는 새벽
창밖 웃자란 풀들이 머리를 가로젓는다
보퉁이에서 삐져나온 풋나물처럼
금방 시들어버릴 표정으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혼자서 자라는 들녘의 푸른 풀들아!
바람아!
- 이창수, 『귓속에서 운다』 (실천문학사, 2011)
[출처] 《주제 시 모음》 작성자 느티나무
/ 2021.10.15(금) 옮겨 적음
https://blog.naver.com/edu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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