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시 읽어주는 남자] '겨울산' 황지우 (2021.10.02)

푸레택 2021. 10. 2. 10:20

 

■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감상]

침묵으로 삶을 가르치는 겨울산

다윗 왕의 반지에는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반지가 만들어진 사정은 이렇다. 소년시절에 거인 골리앗을 무릿매로 쓰러뜨려 단박에 영웅이 된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일을 위해 늘 전쟁터를 전전했다. 그런 그에게 승리에 도취하거나 패배에 좌절하는 것은 금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공사에게 기쁨을 억제할 수 있게 하고 패배에 낙담하지 않게 할 잠언이 새겨진 반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고민에 빠진 세공사가 솔로몬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솔로몬이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는 글귀를 말해줬다고 한다. 승리의 기쁨도 지나가고, 패배의 슬픔도 지나가기 마련이니 일희일비에 얽매이지 말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매진하라는 것이 솔로몬의 생각일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간다는 솔로몬의 말은 일견 궁여지책의 잠언으로 들릴 수도 있다. 어려움에 맞서지 않고 삶의 난관을 그냥 지나쳐버리려는 일군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이 자신들의 무력을 감출 수 있는 화려한 변명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지우의 「겨울산」은 짧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겨울 산은 춥고 황량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삶처럼 신산(辛酸)해 보이기에 시인은 “너도 견디고 있구나”라는 동질감의 속내를 건넨다. 견딘다는 것은 지나간다는 것과는 다른 질감을 갖는다. 견딤의 시간에는 무게가 있지만 지나감(회피)의 시간에는 무게가 없다. 회피하는 자의 삶은 수다스럽고 경박하지만 견디는 자의 삶은 투박하고 정직하다. 그래서 견디는 자의 삶은 오롯이 믿음이 간다.

우리의 삶이란 ‘이 세상에 세 들어’ 사는 것과 같기에 그 삶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이란 ‘월세’처럼 꼬박꼬박 지불해야할 것이라는 시인의 생각은 무거워 보인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종일관 꽃길만 걷는 삶은 없다. 그런 삶은 허상이다. 삶이란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것은 해석이 필요 없는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다. ‘기회주의자’들은 삶의 고통을 피하려고 이런저런 사색의 말들을 변명처럼 들이댄다. 그래서 고통이 더 많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다. 삶에 대해 알긴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근심이 많다. 지식인들이 기회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중국의 선승(禪僧) 조주(趙州)에게 어느 학승이 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조주가 밥은 먹었냐고 되묻자 학승이 먹었다고 하자 넌지시 “그럼 밥그릇이나 닦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학승이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조주 선사의 말처럼 들린다. 우리가 겨울 산처럼 고통을 견뎌야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식구들 때문이다. 식구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빨리 달려가는 것이 삶의 진리다.

글=신종호 시인

/ 2021.10.0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