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락당(獨樂堂) /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
- 《산정묘지》 (민음사, 2002)
[감상]
숭고한 정신이 깃든 마음의 거처
세계를 조망하며 삶의 숭고(崇高)한 지표를 제시해주는 스승들이 없는 사회는 시끄럽고 지리멸렬하다. 크고 우뚝한 산맥이 있어야 능선이 뻗어나갈 수 있다. 요즘 시대는 스승이 없다. 아니, 스승들은 타살되었다. 자신이 마치 큰 인물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소영웅주의가 스승을 사지(死地)로 몰아냈다. 스승의 자리는 포털사이트가 차지했고, 지식은 검색의 결과가 되었다. 철학은 없고 실용만 난무한다.
정신적 가치는 야위고 물질적 가치만 비대해지는 불균형이 시대의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지식인들의 진단은 자기 밥그릇을 챙기려는 엄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경고다. 숭고함이 없는 삶은 비루하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루카치(Georg Lukacs)의 고백이 뼈아프게 들린다.
조정권 시인의 「독락당」은 왜소해진 우리들의 정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홀로 즐거움을 누리는 집이라는 뜻의 ‘독락당(獨樂堂)’은 세상과 고립되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도피의 공간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연암 박지원은 은둔 시절 자신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최진겸(崔鎭謙)이 ‘독락재(獨樂齋)’라는 서재를 짓자 ‘독락’의 독서보다는 세상 사람과 함께 누리는 ‘중락(衆樂)’의 독서가 옳지 않겠냐는 입장을 〈독락재기(獨樂齋記)〉라는 글에서 넌지시 강조했다.
중락의 입장을 강조한다면 조정권의 독락당은 도피와 자족의 공간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권의 독락당은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보다는 정신의 거처, 즉 숭고의 수직적 공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대하고 높은 것들 앞에서 인간은 왜소함을 느낀다. 왜소함은 불쾌의 감정이지만 그 불쾌감을 숭고의 감정으로 상승시키는 것이 인간이다.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외경(畏敬)’의 태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정신의 덕목이며, 문명과 문화의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다.
‘벼랑 꼭대기’에 독락당을 짓고, 달을 마주하는 ‘대월루(對月樓)’에 앉아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는 누구일까? 내려오는 길이 부셔졌기에 누구도 갈 수 없는 그곳은 현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숭고의 정신이 깃든 상징의 거처일 것이다. 위대한 정신은 늘 높고 위태롭게 존재한다. ‘벼랑’에 거처하는 정신은 세속의 저잣거리를 밝게 비쳐주는 달빛과 같다. 존경과 두려움의 마음을 갖게 할 정신적 스승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둠 속을 헤매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암담할 것이다.
한편 ‘길을 부셔버린 이’를 니체의 초인(超人)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수동적이다. 길을 부셔버릴 주체는 바로 ‘자신’이다. 자존(自尊)은 자기 정신을 벼랑 끝까지 밀고 가서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리는 능동적 결단의 산물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삶은 자존의 계기와 결단도 드물고, 참다운 스승도 갈망하지 않기에 좀비(zombie)적이다. 이런 우려가 기우였으면 좋겠다.
글=신종호 시인
/ 2021.10.0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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