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월 /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 나희덕,『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 시월 / 이기철
'시월' 하고 부르면 내 입술에선 휘파람 소리가 난다
유행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맨드라미들이
떼를 지어 대문 밖에 몰려와 있다
쓸쓸한 것과 쓰라린 것과 서러운 것과 슬픈 것의 구별이 안 된다
그리운 것과 그립지 않은 것과 그리움을 떠난 것의 분간이 안 된다
누구나를 붙들고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이마에 단풍잎처럼 날아와 앉는다
연록을 밟을 때 햇빛은 가장 즐거웠을 것이다
원작자를 모르는 시를 읽고 작곡가를 모르는 음악을 들으며
나무처럼 단순하게 푸르렀다가 단순하게 붉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고요한 생들은 다 죽음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다녀올 수 있으면 죽음이란 얼마나 향기로운 여행이냐
삭제된 악보같이 낙엽이 진다
이미 죽음을 알아버린 나뭇잎이 내 구두를 덮는다
시월은 이별의 무늬를 받아 시 쓰기 좋은 시간이다
- 이기철, 『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2005)
■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문태준,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 2021.10.0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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