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강우' 김춘수, '하관' '이별가' 박목월 (2021.07.09)

■ 강우(降雨) / 김춘수(2001)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감상의 길잡이] 김춘수의 '강우'는 아내와의 사별(死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화자의 심정을 애절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특히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의 풍경을 제..

[명시감상] '사평역에서' 곽재구, '고모역' 구상, '병점' 최정례, '역' 김승기 (2021.07.08)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명시감상]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 윤성학 (2021.07.08)

■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 / 윤성학 갈빗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신발 담당과 시비가 붙었다 내 신발을 못 찾길래 내가 내 신발을 찾았고 내가 내 신발을 신으려는데 그가 내 신발이 내 신발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 그러므로 나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이 구두의 이 주름이 왜 나인지 말하지 못한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꽃잎 속에 고인 햇빛을 손에 옮겨담을 때, 강으로 지는 해를 너무 빨리 지나치는 게 두려워 공연히 브레이크 위에 발을 얹을 때,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서며 그의 문지방을 넘어설 때, 손닿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을 잡고 싶어 자꾸만 발끝으로 서던 때, 한걸음 한걸음 나를 떠밀고 가야 했을 때 그때마다 구두에..

[명시감상]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 엘렌 코트, '성공이란' 랠프 에머슨 (2021.07.07)

■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 / 엘렌 코트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 모든 것을 한 입씩 물어뜯어 보라 또 가끔 도보 여행을 떠나라 자신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가르쳐라 거짓말도 배우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만들라 돌들에게도 말을 걸고 달빛 아래 바다에서 헤엄도 쳐라 죽는 법을 배워두라 빗속을 나체로 달려보라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흐르는 물 위에 가만히 누워 있어 보라 그리고 아침에는 빵 대신 시를 먹으라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라 엘렌 코트 : 미국 시인(1936~2015) ■ 성공이란 / 랠프 월도 에머슨 날마다 많이 웃게나 지혜로운 사람에게 존경받고 해맑은 ..

[명시감상] '비가 내리면' 정헌재, '7월에는 친구를' 윤보영, '목백일홍' 도종환, '초여름' '한 생애가 적막해서' 허형만 (2021.07.06)

■ 비가 내리면 / 정헌재 비가 내리면 비 냄새가 좋고 그 비에 젖은 흙냄새가 좋고 비를 품은 바람 냄새가 좋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좋고 ㅡ 정헌재, '비가 내리면' 전문 ■ 7월에는 친구를 / 윤보영 7월에는 내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낸 친구를 찾겠습니다 바쁘다는 핑게로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았던 친구 설령 친구가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친구를 찾게 되면 내가 먼저 전화를 하겠습니다 없는 번호라고 안내되어도 한 번 더 전화해 보겠습니다 결번이라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묻어둔 기억들을 다시 꺼내겠습니다 7월에 찾고 싶은 친구는 언젠가 만나야 할 그리움입니다 내 사랑입니다 ■ 목백일홍 /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명시감상] '능소화' 나태주, '다시, 능소화' 백승훈, '능소화 편지' 이향아, '능소화 연정' 김은식, '능소화' 조재선 (2021.07.06)

?? 능소화 / 나태주 ??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툭 떨어지는 어여뿐 슬픔의 입술을 본다. 그것도 비오는 이른 아침 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 다시, 능소화 / 백승훈 ?? 땡볕에 그을려 초록 그늘마저 달아오르는 여름 한낮 태양을 능멸하듯 기품을 잃지 않고 한껏 우아하게 피어나는 꽃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한다는 것 누가 뭐라하든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킨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기에 시들기 전 스스로 바닥으로 내려앉은 능소화 차마 밟지 못한다 ?? 능소화 편지 / 이향아 ?? 등잔불 켜지듯이 능소화는 피고 꽃지는 그늘에서 꽃 빛깔이 고와서 울던 친구는 가고 없다 우기지 말 것을 싸웠어도 내가 먼저 말을 걸 것을 ..

[명시감상] '냅다 뛰었다' 이기호, '193일째' 권정순, '소시민의 초상' 김이듬 (2021.07.04)

■ 냅다 뛰었다/ 이기호 골목 삼거리에서 누군가 기침을 했다 흘깃 돌아보던 학생이 냅다 뛰었다 기침이 반복되자 사람들이 흩어졌다 익숙한 길은 사라지고 생소한 길이 생겼다 도망칠 수 없는 낯선 풍경만 남아 쓸쓸히 비 내리는 골목을 지킨다 끝을 모르고 가고 있는 길 낯선 사람들이 낯선 골목을 걷는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이 다가오자 강도 만난 사람처럼 발걸음이 빨라진다 등을 돌리고 냅다 뛰었다 날마다 질병관리본부는 오리무중인 도둑을 공개수배한다 ■ 193일째 / 권정순 마음이 웃으라 명하지 많아도 웃기로 해 저승쯤으로 불어가는 화정터 바람 끝에서 벗겨진 마스크가 가사 없는 노래를 하잖아 가게도 가계도 입을 닫고 변종은 안개 속에서 흰 종이꽃을 접고 있어 이대로라면 걸려 죽기 전에 겁에 질려 파멸할지 몰라..

[명시감상]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이현주​, '요즈음' 유자효, '우기' 장욱관 (2021.07.04)

■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 이현주​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가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는데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설레이는 두물머리 깊은 들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바다 그리워, 푸른 바다 그리워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 요즈음 / 유자효 오랜만에 기별이 왔습니다 비바람을 뚫고 젖은 몸으로 가서 만났습니다 살아있었군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젖은 마스크 속에서 웅얼웅얼 몇 마디를 나누고 귀가하기 위하여 다시 비바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의 실존은 이렇습니다 ..

[명시감상] 그리움의 시.. '강가에서' 이형기, '그리운 이름' 박우복, '그리움 하나 있네', 정유찬 '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2021.07.04)

?? ‘그리움’ 명시 감상 ?? ■ 강가에서 / 이형기 물을 따라 자꾸 흐를라치면 네가 사는 바다 밑에 이르리라고 풀잎 따서 작은 그리움 하나 편지하듯 이렇게 띄워 본다 ■ 그리운 이름 / 박우복 꽃이 피는 날에는 그 이름을 부르지 말자 꽃잎 속에 핀 얼굴 보면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이름까지 부르면 그리운 마음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 버릴 것 같아 봄볕에 앉아 외로움을 엮는다 ■ 그리움 하나 있네 / 정유찬 하늘을 봐도 나무를 봐도 울컥 솟아오르는 그리움 하나 있네 ​ 그리움으로 시를 써 바람에 부치고 남은 그리움으로 그림을 그려 하늘에 걸었네 ​ 그러니 세상이 온통 그리움이네 봄, 여름 지나 가을 가고 겨울이 와도 언제나 내게는 아름다운 느낌으로 그리움 하나 커지고 있었네 ■ 그립다는 것은 / 이..

[명시감상]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2021.07.04)

■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를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날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이해와 감상]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