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우(降雨) / 김춘수(2001)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감상의 길잡이]
김춘수의 '강우'는 아내와의 사별(死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화자의 심정을 애절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특히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의 풍경을 제시하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계속해서 아내를 찾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만든다. 생선을 구운 냄새가 나는 식탁,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아내의 목소리와 같이 사소한 일상을 내내 같이 했던 아내가 없다는 사실을 화자가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아내는 없기에 결국 화자는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나 하는 미련에 창밖을 내다보지만 어느새 내리는 빗발과 어둠 탓에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고 따라서 아내를 찾을 길은 더욱 멀어지게 된다. 풀이 죽은 화자는 아내와의 사별을 받아들이고 체념과 절망에 빠져들게 된다.
■ 이별가 / 박목월
뭐라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어서
이승 아니믄 저승에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뭐라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은 말자, 하직은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라카노 뭐라카노 뭐라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라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 바람에 불어서
오나, 오나, 오나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박목월(1916~1978)('박목월시전집', 민음사, 2003)
인연의 '동아밧줄'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이 되었다. 그 바람에 '니 음성'은 저승으로 불려가고 '나의 목소리'는 이승으로 날린다. 왁살스러운 경상도 사투리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는 다 펼치지 못한 정(情)을 향한 애타는 물음이다. '오냐, 오냐, 오냐'는 이승의 인연을 저승의 인연으로 잇대려는 간절한 응답이고 다짐이다.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하관'). 피안의 강가에서 나누는 이별가는 '뭐락카노'와 '오냐'의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이고 '자연의 한 조각'이다. 그러니 이 별과 이별할 때는 '하직(下直)'을 고하지 말 일이다. ㅡ 정끝별 시인
■ 하관(下棺) /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다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질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감상]
이 시는 아우가 죽은 뒤에 아우를 그리워하다가 꿈에서 아우를 보고 아우가 있는 세상과 화자가 있는 세상이 단절된 세상이라는 것을 내용으로 쓴 시이다.
'관(棺)이 내렸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은 아우의 관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우를 잃은 슬픔이 화자의 마음 안에 가득 자리잡았음을 말하고 있다. 형인 화자는 아우가 기독교의 신에게 용납되기를 기원한다. ‘주여 / 용납하옵소서’. 그리고는 관 위 아우의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 좌르르' 흙을 쏟아 묻으며 아우와 '하직(下直)했다.'
화자는 '그 후로'도 동생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 하다가 '그를 꿈에서 만났다.'. 꿈에서 만난 동생의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 형님! / 불렀다.' 그리던 동생의 부름에 화자는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동생은 화자의 대답에 반응이 없이 사라졌다. 우애가 깊었던 화자의 동생이 화자의 대답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화자는 자신이 전신으로 응한 대답에 반응이 없는 동생이 반응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들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위안한다. 왜냐하면 동생이 있는 죽은 뒤의 세계와는 달리 화자가 있는 이곳은 시간이 흐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 이제 / 네 음성을 / 다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이라고 표현했다. '눈과 비가 오는 세상'은 '겨울'과 '여름'의 계절을 말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봄'과 '가을'을 말하지 않은 것은 화자의 슬픈 상태를 나타내기에는 시련이나 눈물을 나타내는 '눈과 비'가 더 적합하다.
'너는 어디로 갔느냐 /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질을 하고'는 꿈에서 아우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우가 죽어 이 세상에 없음을 설의법 형식으로 묻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우와 화자는 서로 다른 세상에 있다. 삶의 세계와 죽은 뒤의 세계이다. 화자의 생각에는 죽은 뒤에 세계는 이 세상에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데 삶의 세계에는 죽은 뒤의 세계에 목소리 전달되지 않는 세계이다. 그리고 삶의 세계는 시간의 흐름과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를 화자는 '형님! /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 다만 여기는 / 열매가 떨어지면 /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제 / 네 음성을 / 다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과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 다만 여기는 / 열매가 떨어지면 /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화자가 있는 '여기는'은 '눈과 비가 오는 세상'이고 '열매가 떨어지면 /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다. 시간의 흐름과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러면서 아우가 없는 세상이 매우 슬프고 적막함을 나타내고 있다.
■ 제망매가(祭亡妹歌) / 월명사
생사로난
예 이샤매 저히고
나난 가나다 말도
몯다 닏고 가나닛고 어
느 가잘 이른 바라매
이에 저에 떠딜 닙다이
하단 가재 나고
가논 곧 모다온뎌
아으 미타찰애 맛보올 내
도 닷가 기드리고다
(삶과 죽음의 길은
이에 있음에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 세계에서 만나볼 나는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
* 옛글자가 지원되지 않아, 아래아는 ㅏ 로, 반치음은 ㅈ 으로 표기함
[제망매가 배경설화]
월명이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49재를 올리며 향가를 지어 제사했더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 지전(紙錢-종이돈)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졌다. 노래는 이러하다. 생사의 길은 /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지고
/ 나는 갑니다 하는 말도 / 다 못하고 가버렸는가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 한가지에 낳아 가지고 / 가는 곳 모르누나 /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월명이 항상 사천왕사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한번은 달밤에 절 대문 앞 큰길에서 피리를 불었더니, 달이 그 피리 소리에 운행을 멈추었다. 그래서 그 길을 월명리라 했고 월명사도 이를 인해서 이름이 났다. 신라 사람들 가운데 향가를 숭상하는 이가 많았으니 향가란 대개 시경의 송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기리어 읊는다. 바람은 지전을 날려 저 세상 가는 누이의 노자 되게 했고 피리 소리는 밝은 달 움직여 선녀를 머물게 했구나. 도솔천이 멀다고 그 누가 말하더냐. 만덕화의 노래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제망매가 이해하기]
이 노래는 죽은 사람의, 그것도 혈육인 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그 명복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사후의 세계를 불교적으로 본 것으로, 서방 극락정토, 무량수(無量壽)를 누릴 수 있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의 세계를 말한다. 즉, 극락은 사람이 죽은 뒤에 가야 할 세계이고, 현세의 삶은 그곳에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막상 죽음에 다다랐을 때 월명은 죽음의 현장성을 느꼈다. 월명은 죽어 가는 누이를 보면서, 살아 있는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과 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하여, 죽음에 대한 서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죽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한 형상화는 누이의 죽음으로 더 한층 짙게 인식된다. '어느'란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게 아니고 언제나 있는 시간으로 시시로 닥쳐오는 죽음을 인식하게 해준다. 죽음 앞에 서 있는 동류의식(同類意識)의 표현인 '한 가지에 나고'는 현상적으로 인식되지만 죽음에 있어서의 그것은 미지이다(가는 곳을 모르누나). 이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에 바탕한 무상의 표현이다. 육도환생(六道還生)이라는 교훈적인 종교의 내세관에서 보다는 삶 그 자체가 하나의 나뭇잎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의 허무감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감은 결국 종교적인 귀의를 가지게 한다. 그래서 "미타찰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겠다." 하여 인생의 허무감을 아미타불에 귀의함으로써 종교적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나 서방 극락정토에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가서 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도를 닦으며 기다려야 한다. 누이는 이미 그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초월적인 대상에게 기원하는 의식가로서의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제라는 의식적 배경을 무시한다면 순수한 서정시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죽음과 삶이 혼용된 인간세계에서 죽음과 삶의 갈등을 항상 겪어야만 하는 인간. 그가 느끼고 있는 삶에 대한 허무감 등은 인간이 넘지 못 할 하나의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것의 인식과 생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적절한 시어의 선택과 표현법으로 죽음에 대한 서정을 담고 있다. 이렇게 인간적인 슬픔을 종교적 정신 세계로 승화 초극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후에 만해 한용운의 시 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행에서 4행까지는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삶의 허무함과 진한 남매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5행에서 8행까지는 누이와의 속세에서의 인연을 그리면서 죽음에서 느끼는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누이와의 혈육 관계를 한 가지(부모)에 난 나뭇잎으로 비유하고, 누이의 요절을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에 비유한 고도의 비유법이 보인다. 9, 10행은 '낙구'라고 하는데, '낙구' 첫머리의 감탄사 '아으'는 극한에 다다른 고뇌를 분출시키면서, 그것을 종교적으로 초극하는 전환으로 이끌고 있다.
/ 2021.07.09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