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 / 윤성학
갈빗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신발 담당과 시비가 붙었다
내 신발을 못 찾길래 내가 내 신발을 찾았고
내가 내 신발을 신으려는데
그가 내 신발이 내 신발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
그러므로 나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이 구두의 이 주름이 왜 나인지
말하지 못한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꽃잎 속에 고인 햇빛을 손에 옮겨담을 때,
강으로 지는 해를 너무 빨리 지나치는 게 두려워
공연히 브레이크 위에 발을 얹을 때,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서며 그의 문지방을 넘어설 때,
손닿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을 잡고 싶어
자꾸만 발끝으로 서던 때,
한걸음 한걸음 나를 떠밀고 가야 했을 때
그때마다 구두에 잡힌 이 주름이
나인지
아닌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감상]
익숙한 광경이죠? 식당에서 가끔 겪는 ‘신발 주인’ 논쟁. 윤성학 시인도 그랬나 봅니다.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은 그가 서울 충무로의 한 돼지갈빗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다 ‘신발 소동’을 겪고 난 뒤에 쓴 시입니다.
그 집에는 신발 벗는 곳에 남자 직원이 지키고 서서 손님이 앉는 자리를 보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선반에 신발을 놓아주었지요.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서인지 신발 담당직원이 그에게 낯선 신발을 내려놓았습니다.
“어? 이거 내 신발 아닌데요.” “이 신발 맞습니다.” “아니에요. 내 신발 아니에요.” “제가 분명히 8번 자리에 놓았습니다. 이 신발이 손님 것 맞습니다.” “8번은 맞는데요. 내 신발이 아니구요… 내 신발은… 저기 있네요. 저거예요.” “아닙니다. 이 신발입니다.”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다른 자리에 앉은 손님들을 불러 각자 신발을 찾게 한 뒤에야 그는 자기 신발을 신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을 법한 일이지만, 시인의 촉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 그는 자신의 신발을 증명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에서 인생의 새로운 단면을 발견하지요. 그게 바로 ‘주름’입니다.
늦은 밤 그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같은 종류, 같은 크기의 신발이라도 사람마다 신발에 잡힌 주름과 뒷굽이 닳은 모양새는 전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내 신발에 잡힌 주름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a=b이고 b=c일 때 a=c이다. 그러므로 나=신발, 신발=주름, 나=주름이라는 삼단논법이 가능하겠구나.’
그는 다시 ‘나에게 잡힌 주름’을 곰곰 생각합니다. 그것이 언제, 무엇을 할 때, 왜 생겼을까. ‘아, 신발에 잡힌 주름이란 결국 내가 살아온 내력의 총합이구나. 꽃잎 속의 햇빛을 손에 담으려고 무릎을 꿇고 앉을 때 생긴 주름, 석양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 생긴 주름, 손닿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을 잡고 싶어 발끝으로 설 때 생긴 주름….’
그는 이것이 이력서의 ‘이력(履歷)’이라는 말에 ‘신발 리(履)’를 쓰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죠. 이력이란 자기 신발이 걸어온 역사이지요.
그는 이후로도 그 집에 가끔 갔습니다. 신발 담당은 자기가 할 일을 한 것이고, 단순한 착오가 있었을 뿐 대단한 잘못을 한 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그 집은 맛있고 쌌죠. 그러나 그 음식점은 지금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신발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기억 속 작은 방에 기록돼 이렇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시란 ‘재미의 재구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신이 내준 퀴즈를 푸는 사람”이라고도 했지요. 신이 내준 퀴즈를 푸는 과정을 재미있게 재구성한 것이 곧 시라…. 갈빗집에서 ‘신발 찾기’라는 퀴즈를 통해 그가 찾아낸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은 이렇게 기발한 ‘재미의 재구성’까지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그의 시를 읽은 뒤로 저도 식당에 갈 때마다 제 구두를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그러면서 제 구두에 잡힌 주름들이 왜 저인지를 저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슬며시 걱정하기도 합니다. (고두현 시인)
/ 2021.07.0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