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비가 내리면' 정헌재, '7월에는 친구를' 윤보영, '목백일홍' 도종환, '초여름' '한 생애가 적막해서' 허형만 (2021.07.06)

푸레택 2021. 7. 6. 11:34

■ 비가 내리면 / 정헌재

비가 내리면
비 냄새가 좋고

그 비에 젖은
흙냄새가 좋고

비를 품은
바람 냄새가 좋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좋고

ㅡ 정헌재, '비가 내리면' 전문

■ 7월에는 친구를 / 윤보영

7월에는
내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낸
친구를 찾겠습니다

바쁘다는 핑게로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았던 친구

설령 친구가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친구를 찾게 되면
내가 먼저
전화를 하겠습니다

없는 번호라고 안내되어도
한 번 더
전화해 보겠습니다

결번이라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묻어둔 기억들을
다시 꺼내겠습니다

7월에 찾고 싶은 친구는
언젠가 만나야 할 그리움입니다
내 사랑입니다

■ 목백일홍 /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서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 초여름 / 허형만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 한 생애가 적막해서 / 허형만

빗소리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팔을 끄집어다가 팔베개하고 눕는다
숲에서 방방 뛰어놀았는지
초록 내음이 콧속에서 진동한다
이파리 초록 물 떨구는 소리
풀벌레 호르르 날갯짓 소리
소리가 소리에게 서로 안부라도 묻는 듯
밤새 가슴으로 파고드는
빗소리가 가창오리 떼처럼 꿈속을 뒤덮는다
한 생애가 적막해서
잠 못 이루는 걸 다 안다는 듯
말랑말랑한 빗소리가
이불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