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냅다 뛰었다/ 이기호
골목 삼거리에서 누군가 기침을 했다
흘깃 돌아보던 학생이 냅다 뛰었다
기침이 반복되자 사람들이 흩어졌다
익숙한 길은 사라지고
생소한 길이 생겼다
도망칠 수 없는 낯선 풍경만 남아
쓸쓸히 비 내리는 골목을 지킨다
끝을 모르고 가고 있는 길
낯선 사람들이 낯선 골목을 걷는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이 다가오자
강도 만난 사람처럼
발걸음이 빨라진다
등을 돌리고 냅다 뛰었다
날마다 질병관리본부는
오리무중인 도둑을 공개수배한다
■ 193일째 / 권정순
마음이 웃으라 명하지 많아도
웃기로 해
저승쯤으로 불어가는 화정터 바람 끝에서
벗겨진 마스크가 가사 없는 노래를 하잖아
가게도 가계도 입을 닫고
변종은 안개 속에서 흰 종이꽃을 접고 있어
이대로라면
걸려 죽기 전에 겁에 질려 파멸할지 몰라
억지로라도 뭘 먹어야 살 듯
표정을 조각해서라도
웃기로 해
웃음 없는 세상에서 웃음
더는 기다리지 마
먼저 웃고 봐
얼굴에서 마음에게
선 조치 후 보고 해
■ 소시민의 초상 / 김이듬
정오가 지났을 때 소나기가 왔다
조각구름이 허공에서 무익하게 사라졌다
물에서는 물맛이 났다 봄부터 그는 냄새를 맡지 않았다 눈썹만 그렸다 마스크를 하고 실패를 기록하지 않았다 성취할 목적이 없었다 하루가 단조로웠다 재회하려던 사람은 자신을 격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시 귀국한 사람처럼 그도 홀로 있는 시간에 언젠가는 돌아갈 일상이 있는 것처럼 비교적 무기력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고민하던 시절에 쓴 소설이 본의 아니게 하루를 구성했다 불시에 나타났다가 저절로 사라지는 증상이 아니었다니 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가 이토록 아름답다니 세계의 한 변방처럼
폐쇄된 미술관 앞에서 그는 일요일 날씨에 관한 거리감 있고 가벼운 농담이라도 건네고 싶다 행인들과 최대한 멀리 서서 손 소독제를 바르고 마스크를 착용한다
금방이라도 경보가 울릴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는 타지역 확진자의 이동 동선을 알려오고 대화나 노래 부르기를 자제하라고 한다
/ 2021.07.04(일)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