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추억', '소라',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2021.06.20)

■ 소라 /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 늘, 혹은 때때로 /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

[명시감상] '나리꽃', '라일락꽃',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2021.06.20)

■ 라일락꽃 / 도종환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 처음 가는 길 /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 도종환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명시감상] '만남',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2021.06.20)

■ 만남 / 김재진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통째로 그 사람의 생애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아픔과, 그가 가진 그리움과 남아있는 상처를 한꺼번에 만나기 때문이다 ■ 길 위에 있는 동안 행복하다 / 김재진 둥근 우주같이 파꽃이 피고 살구나무 열매가 머리 위에 매달릴 때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는 걸을 수 있는 동안 행복하다 구두 아래 길들이 노래하며 밟히고 햇볕에 돌들이 빵처럼 구워질 때 새처럼 앉아있는 후박꽃 바라보며 코끝을 만지는 향기는 비어있기에 향기롭다 배드민턴 치듯 가벼워지고 있는 산들의 저 연둣빛 기다릴 사람 없어도 나무는 늘 문 밖에 서 있다 길들을 사색하는 마음 속의 작은 창문 창이 있기에 집들은 다 반짝거릴 수 있다 아무것도 찌르지 못할 가시 하나 내보이며 찔레가 어느새 ..

[명시감상] '무명용사의 편지' 정옥희.. 6월의 노래 '비목(碑木)', '전선을 간다' (2021.06.19)

■ 무명용사의 편지 / 정옥희 열일곱 열여덟 스물 남짓 텃밭에서 허리가 휘던 어머니와 알 감자 하나에 허기가 지던 보릿고개 한스러운 아우와 뽀얀 이빨 드러내며 무꽃처럼 흐드러지게 웃던 분이, 마을 동산 환하게 밝혀주던 고향의 하늘을 사랑하는 착하디 착한 무지랭이 농군의 아들이었습니다 펜 대신 총을 들고 내 어머니와 내 아내 군화에 짓밟히며 소리없이 스러지던 고향의 꽃들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가던 그날도 오늘처럼 햇살 눈부시고 하늘 푸르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지금은 혀도 썩고 귀도 썩고 눈도 썩어 더 이상 썩을 것 없는 뼈만 남아 지명을 알 수 없는 조국산천에 묻혔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백골을 찾아 백발이 되신 내 어머니 슬퍼마셔요 조국은 아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따뜻한 조국의 ..

[명시감상] '김치찌개 평화론' 곽재구,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철조망에 걸린 편지' 이길원.. '판문점의 달밤', '전장에 피는 꽃' (2021.06.18)

■ 김치찌개 평화론 / 곽재구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

[명시감상] '전야(前夜)', '초소에서' 안도현.. '이등병 편지', '입영 전야', '비내리는 판문점' (2021.06.18)

■ 전야(前夜) / 안도현 늦게 입대하는 친구와 둘러앉아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소주잔에 고인 정든 시간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하는 이 겨울밤 창 밖에는 희끗희끗 삐라 같은 첫 눈이 어둠 속을 떠다니고 남들이 스물 갓 넘어 부르던 군가를 꽃 피는 서른이 다되어 불러야 할 친구여, 식탁 가득 주둔 중인 접시들이 입 모아 최후의 만찬이 아니야 아니야 그래, 때가 되면 떠나는 것 까짓껏 누구나 때가 되면 소주를 마시며 모두 버리고 가면 되는 것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버려도 버려도 끝까지 우리 몸에 남는 것은 밥과 의무, 흉터들 제각기 숨가빴던 시절들을 등뒤로 감추고 입술 쓴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돌리노라면 옷소매 밑에 드러나는 부끄러운 흰 손목이여, 얼마나 많은 치욕이 우리의 두 손목을 적시며 흘러갔는지 늦은..

[명시감상] '금강초롱' 송수권, '순간의 평화' 정세훈,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2021.06.18)

■ 금강초롱 / 송수권 금강산 비로봉 밑에만 피는 꽃인 줄 알았더니 큰기러기 작은기러기 쇠기러기 큰고니 작은고니 철따라 쉬어가는 철원평야 휴전선 철책 밑에서도 희귀한 금강초롱꽃이 피었다 바람 불어 키를 넘어 갈대숲 마른 덩굴을 드러내면서 네다섯 예닐곱 송이씩 초파일 연등처럼 흔들리면서 떠도는 가시철망에 걸려 찢어질 듯 찢어질 듯 흔들린다 저 피의 능선 안개 자욱한 펀치볼 전투 1951년 8월 31일부터 21일 동안 군번도 이름도 없는 원혼이 금강산 비로봉 밑에서만 피는 꽃인 줄 알았더니 휴전선 가시철망에 걸려 우리 그리움 더하라고 금강초롱 피었다 ■ 순간의 평화 / 정세훈 잔뜩 부푼 풍선이 아이의 손에 들려온다 육이오 전쟁을 치른 퇴역한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원을 평화롭게 넘실거린다 아이 뒤를 따르..

[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평화로 가는 길은' 이해인 (2021.06.18)

[이해인 수녀의 詩편지] ■ 평화로 가는 길은 / 이해인 이 둥근 세계에 평화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 날로 더해갑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왜 이리 먼가요 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멀고도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 가깝고도 먼 내 안의 나에게 맑고 깊고 넓은 평화가 흘러 마침내는 하나로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울겠습니다 얼마나 더 낮아지고 선해져야 평화의 열매 하나 얻을지 오늘은 꼭 일러주시면 합니다 ㅡ 산문집 《풀꽃단상》 중에서 꽃들이 떠난 자리엔 온통 초록의 잎사귀들로 가득하고 간간이 뻐꾹새 소리 들려오는 숲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나무들의 향기를 뿜어냅니다. 6월의 달력을 넘기다 보면 여러 기념일 중 아무래도 6·25 한국전쟁일에 눈길이 머..

[명시감상] '그리운 바다', '바다를 본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선착장 사람들, 우도에 가십니까 1' 이생진 (2021.06.14)

?? 그리운 바다 / 이생진 ?? 내가 돈보다 좋아하는 것은 바다 꽃도 바다고 열매도 바다다 나비도 바다고 꿀벌도 바다다 가까운 고향도 바다고 먼 원수도 바다다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가 되었다 끝판에는 나도 바다가 되려고 마지막까지 바다에 남아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삼킨 바다 나도 세월이 다 가면 바다가 삼킨 바다로 태어날 거다 ?? 바다를 본다 / 이생진 ??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

[명시감상]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박노해 (2021.06.11)

■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박노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국 행복이라는 사실이 행복은 크고 좋은 집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차림의 만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귀히 여기며 작은 것에 감사하는 소박한 저녁 밥상의 웃음속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결국 행복이라는 사실이 행복으로 가는 길은 하나뿐인 길이 아니고 행복하다고 애써 느끼는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고 행복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이의 행복을 생각할 때 온다는 것이 돈과 권력과 미모를 가진 자들에게 멋지게 복수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보다 더 적은 것으로도 더 많이 즐겁고 선함과 정의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라는 사실이 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행복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