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시감상] '시인' 김광섭

■ 시인(詩人) / 김광섭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 팍 안아 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 원 아니면 3천 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 시집 《성북동 비둘기》(1969) 수록 ◎시어 풀이 *천직(天職) : 타고난 직업이나 직분 *어릿궂은 : ‘어리궂은’의 잘못. 매우 어리광스러운 ▲..

[명시감상] 홍도별곡(紅島別曲) / 장홍식 (2021.07.18)

■ 홍도별곡(紅島別曲) / 장홍식(張洪植) 케이티 엑스열차 미끄러져 나르더니 무안반도 언저리 삼학도가 여기로다 목포의 눈물이라 아득히 바라보니 서해대교 가로질러 유달산이 떠있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아래에는 님자취 완연하고 정조는 애닯고나 꽃을따던 처녀와 영산총각 어디갔나 무심한 연안부두 외기러기 짝을찾네 설레이는 방랑객 쾌속선에 몸을싣고 비금과 도초지나 망망대해 바라보니 저너머 海霧중에 黑山이 누워있다 다도해 흑산진의 옛노래가 애닯고나 엘레지 여왕님의 남모르는 슬픈세월 물결은 천번만번 쉴새없이 밀려오고 못견디게 아득한 저육지를 바라보다 그을린 흑산처자 마음마저 검게탔나 석주대문 코끼리 삼라산성 뒤로하고 홍도로 들어가니 기암절벽 가로막네 빙글돌아 피하니 紅島十景 절경일세 거북바위 공작바위 부부탑에 만물..

[명시감상] '나는 배웠다' 마야 안젤루, '비 오는 날의 기도' 양광모, 유트족 인디언의 기도 (2021.07.17)

■ 나는 배웠다 / 마야 안젤루 나는 배웠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오늘 아무리 안 좋아 보여도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을 내일이면 더 나아진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궂은 날과 잃어버린 가방과 엉킨 크리스마스트리 전구 이 세 가지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당신과 부모와의 관계가 어떠하든 그들이 당신 삶에서 떠나갔을 때 그들을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삶은 때로 두 번째 기회를 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양쪽 손에 포수 글러브를 끼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무엇인가를 다시 던져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열린 마음을 갖고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대개 올바른 ..

[소설읽기] '용가리 통뼈' 유순하 (2021.07.15)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82) 《우리들의 조부님, 용가리 통뼈》에 실려있는 유순하의 중편소설 「용가리 통뼈」를 읽었다. ■ 용가리 통뼈/ 유순하 강영수의 의식에서는 ‘용가리 통뼈’가 거푸 되뇌어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였다. 오래전에 읽어 이제는 그 제목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제하의 어떤 소설에서 보기는 했으나, 사실은 그 뜻이 무엇인가 조차도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 한 번도 입술에 올려 보았던 적이 없는 소리였다. 이상스럽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갸웃거려 보기를 되풀이하고 있는데도 마치 무슨 버릇이나 생리작용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 그 소리가 되뇌어지곤 했다. ‘내가 뭐 용가리 통뼈가?’ 그런 것이었다. 그 소리 뒤에 후렴처럼 거의 어김없이 이어지는 또 하나의 소리가 있었..

[명시감상] '선셋 라이더' 윤성학, '업어 준다는 것' 박서영, '꽃양귀비 활짝' 권숙월 (2021.07.15)

?? 선셋 라이더 / 윤성학 ?? 해가 진다 원효대교 남단 끝자락 퀵서비스 라이더 배달 물건이 잔뜩 실린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휴대폰 카메라로 서쪽 하늘을 찍는다 강 건너 누가 배달시켰나 저 풍경을 짐 위에 덧얹고 다시 출발 라이더는 알지 못 하네 짐 끈을 단단히 묶지 않았나 강으로 하늘로 차들 사이로 석양이 전단지처럼 날린다는 것을 무엇이 퀵퀵퀵, 달리는 라이더를 멈추게 했나. 무엇이 부릉부릉, 달아오른 실린더 심장을 멈추게 했나. 택배를 기다리는 ‘우두커니’들을 위해 ‘쏜살같이’ 달려야 하는 라이더가 어찌 그림자 긴 ‘어둑서니’가 되었는가. 선셋은 아버지 태양의 하루 임종이 아닌가. 라이더도 그의 적자임이 분명하니 아무리 바빠도 그렁그렁 예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

[명시감상] '나팔꽃' 권대웅, '터미널 2' 이홍섭, '바지락 끓이는 여자' 려원 (2021.07.15)

?? 나팔꽃 / 권대웅 ?? 문간방에서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 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길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경사 났네요. 나라가 저출산으로 걱정인데 미래의 주인이 오셨네요. 단칸방이어서 마음 더 애틋하고, 문간방이어서 꿈은 더 별빛이었겠죠. 꿀벌 닝닝거리는 소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어쩐지 나팔꽃이 가스관 타고, 전선줄 타고 빙글빙글 올라가 싱글싱글 웃더군요. 꿀벌 지나간 자리, 씨앗 영그는 건 만고의 이치죠. 나팔꽃 스피커는 조심해야..

[소설읽기] '누란의 사랑' 윤후명 (2021.07.13)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78) 《협궤열차》에 실려있는 윤후명의 중편소설 「누란의 사랑」을 읽었다. 이제 ㅎ과 동거하기 전에 만난 다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만남의 성격 때문에 그 여자는 이니셜조차 밝히지 않기로 한다. 우리가 만나서 함께 지낸 것을 아직 어떻게 정의 내릴 자신이 없기도 한 것이다. 그 방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지지부진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눅눅하게 습기가 차고, 채광이 되지 않은 그 방에서의 생활은, 그러나 뜻이 같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동거라고 하기보다는 동서(同棲)생활이라고 하는 편이 좀더 적확한 표현일 듯 싶다. (중략)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얼마를 구태여 따진다면 두 달 열흘이었다...

[명시감상] '안부' 김시천, '친구에게' 김재진, '한 둘' 허형만, '외로운 벗에게' 조병화, '서울 사는 친구에게' 안도현 (2021.07.12)

■ 안부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다 (김시천·시인, 1956~) ■ 한 둘 이만큼 살다보니 함께 나이 든 친구 한 둘 뭐 하냐 밥 먹자 전화해 주는 게 고맙다 이만큼 살다보니 보이지 않던 산빛도 한 둘 들리지 않던 풍경소리도 한 둘 맑은 생각 속에 자리잡아 가고 아꼈던 제자 한 둘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찔레꽃 시모음] '찔레꽃' 신경림, '찔레꽃의 전설' 최영희, '찔레꽃 향기는' 안행덕, '찔레꽃' 이외수, '찔레꽃 내 고향' 유응교, '찔레꽃' 장사익 (2021.07.11)

■ 찔레꽃 / 장사익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 찔레꽃 / 김영일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우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 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

[명시감상]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 이준관, '풀꽃과 놀다' 나태주, '화초와 잡초 사이' 복효근 (2021.07.09)

■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 / 이준관 쑥부쟁이 피었구나, 언덕에 쑥부쟁이야, 너를 보니 모두들 소식이 궁금하구나 늙은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를 파고들던 달빛은 잘 있는가 전봇대에 오줌을 갈기던 개는 달을 보고 걸걸걸 잘 짖어대는가 해거리를 하는 감나무에 올해는 유난히 감이 많이 열렸는가 볼때기에 저녁 밥풀을 잔뜩 묻히고 나와 아아아아 산을 향해 제 친구를 부르던 까까머리 소년은 잘 있는가 ■ 풀꽃과 놀다 / 나태주 그대 만약 스스로 조그만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풀밭에 나아가 풀꽃을 만나 보시라 그대 만약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라 여겨진다면 풀꽃과 눈을 포개 보시라 풀꽃이 그대를 향해 웃어줄 것이다 조금씩 풀꽃의 웃음과 풀꽃의 생각이 그대 것으로 바뀔 것이다 그대 부디 지금, 인생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