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팔꽃 / 권대웅 ??
문간방에서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 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길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경사 났네요. 나라가 저출산으로 걱정인데 미래의 주인이 오셨네요. 단칸방이어서 마음 더 애틋하고, 문간방이어서 꿈은 더 별빛이었겠죠. 꿀벌 닝닝거리는 소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어쩐지 나팔꽃이 가스관 타고, 전선줄 타고 빙글빙글 올라가 싱글싱글 웃더군요. 꿀벌 지나간 자리, 씨앗 영그는 건 만고의 이치죠. 나팔꽃 스피커는 조심해야 해요. 어느 시골 이장님, 마이크 켜진 줄 모르고 내외 사랑 나누다가 온 동네 사람 귓바퀴에 꿀물 쏟아부었다죠. 더워도 창문 꼭 닫아 걸어요. 청포도 대신 열대야 들고 칠월이 오시네요. (글=시인 반칠환)
?? 터미널 2 / 이홍섭 ??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엄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은
저 넘치는 울음을 받아줄 수 없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터미널에서
저기 앳되고 앳된 한 여인이 울고 있다
어느 고속버스터미널 니은자 모퉁이에서 앳된 청년이 뒤돌아보고 있다. 제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고속버스가 유턴하고 있다. 청년은 주먹으로 눈 밑을 훔치며 버스를 바라본다. 낯선 승객들이 손을 흔든다. 해마다 배차가 줄어드는 낡은 터미널이 남아 있는 동안 돌아갈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부르쥔다. 휴대폰 사진첩에서 까르르 웃는 앳된 웃음 하나를 꺼내 바탕화면으로 지정한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곳. 터미널은 눈물과 환호 사이 애써 무표정하다. (글=시인 반칠환)
?? 바지락 끓이는 여자 / 려원 ??
이혼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여자는 바지락을 씻어요
조개들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어요
더 이상 밀물이 들지 않는 해안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요
결막염 걸린 눈은 수평선에 걸린 노을처럼 붉어요
조바심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거품을 뱉어낸 조개들이
입을 벌리고 부글부글 소리를 내요
밸브를 잠그고 깨소금을 뿌려요
아뿔싸, 국물을 떠올린 숟가락에
가슴에서 부글부글 올라온 눈물이 뚝 떨어져요
알맹이를 내놓은 껍질들을 땅에 버려요
식탁 위 이혼서류가
바지락 국물에 젖어가고 있어요
썰물은 잘 찢어져요
해안선은 두 세계가 찢어진 곳이에요
서류는 이미 만조로 깊고 외딴 섬처럼
서명란의 빈칸이 둥둥 떠다녀요
마음껏 울어도 돼요. 바지락 끓는 소리가 흐느낌을 지워줄 거예요. 눈물이 넘쳐나니 국물로 채워요. 우리 발밑을 받쳐주는 어머니 대지도 이혼을 거듭했다죠. 한 몸인 줄 알았던 팡게아가 갈라져서 곤드와나와 앙가라가 되었다죠. 곤드와나가 갈라져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되었다죠. 앙가라가 갈라져서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가 되었다죠. 지금도 판판이 싸우면서 불의 고리마다 활화산 이혼 도장을 찍고 있죠. 상처마다 대양이 출렁거리고, 아픔마다 생명이 깃들고 있죠. 목 놓아 울어도 돼요. 태평양 같은 바지락 한 그릇 비우고 나면 당신은 우뚝 하나의 대륙이 될 거예요. (글=시인 반칠환)
[출처] ‘시로 여는 수요일’ 서울경제
/ 2021.07.15(목)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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