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부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다
(김시천·시인, 1956~)
■ 한 둘
이만큼 살다보니
함께 나이 든 친구 한 둘
뭐 하냐 밥 먹자
전화해 주는 게 고맙다
이만큼 살다보니
보이지 않던 산빛도 한 둘
들리지 않던 풍경소리도 한 둘
맑은 생각 속에 자리잡아 가고
아꼈던 제자 한 둘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말 건네주는 게 고맙다
(허형만·시인, 1945~)
■ 친구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문정희·시인, 1947~)
■ 친구에게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 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김재진·시인, 1955~)
■ 친구에게
친구야
널 한 번도 미워해 본 적이 없어
나를 멀리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네가 밉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미웠어
이렇게 비가 오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리울 땐
자꾸 네 생각이 나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우정이란 걸 넌 아니?
사랑보다 더 깊은 추억을
새겨 준 친구야
(최복현·시인, 1960~)
■ 외로운 벗에게
고독하십니까,
운명이옵니다
몹시 그립고 쓸쓸하고, 외롭습니까,
운명이옵니다
어이없는 배신을 느끼십니까,
운명이옵니다
고립무원, 온 천하에 홀로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계시옵니까
그것도 당신의 운명이옵니다
아, 운명은 어찌할 수 없는
전생의 약속인 것을
그곳에 그렇게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 있는 것도
이곳에 이렇게
가랑잎이 소리 없이 내리는 것도
(조병화·시인, 1921~2003)
■ 서울 사는 친구에게
세상 속으로 뜨거운 가을이 오고 있네
나뭇잎들 붉어지며 떨어뜨려야 할 이파리들 떨어뜨리는 걸 보니
자연은 늘 혁명도 잘하구나 싶네
풍문으로 요즈음 희망이 자네 편이 아니라는 소식 자주 접하네
되는 일도 되지 않는 일도 없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싶거든, 이리로 한 번 내려오게
기왕이면 호남선 통일호 열차를 타고 찐계란 몇 개
소금 찍어 먹으면서 주간지라도 뒤적거리며 오게
금주의 운세에다 마음을 기대보는 것도 괜찮겠고,
광주까지 가는 이를 만나거든 망월동 가는 길을 물어봐도 좋겠지
밤 깊어 도착했으면 하네, 이리역 광장에서 맥주부터 한잔 하고
나는 자네가 취하도록 술을 사고 싶네
삶보다 앞서가는 논리도 같이 데리고 오게
꿈으로는 말고 현실로 와서 걸판지게 한잔 먹세
어깨를 잠시 꽃게처럼 내리고, 순대국이 끓는
중앙시장 정순집으로 기어들 수도 있고, 레테라는 집도 좋지
밤 12시가 넘으면 포장마차 로진으로 가 꼼장어를 굽지
해직교사가 무슨 돈으로 술타령이냐 묻고 싶겠지만
없으면 외상이라도 하지, 외상술 마실 곳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날이 새면 우리 김제 만경 들녘 보러 가세
지평선이 이마를 치는 곳이라네, 자네는 알고 있겠지
들판이야말로 완성된 민주대연합이 아니던가
갑자기 자네는 부담스러워질지 모르겠네, 이름이야 까짓것
개똥이면 어떻고 쇠똥이면 어떻겠는가
가을이 가기 전에 꼭 오기만 하게
(안도현·시인, 1961~)
■ 친구란 어떤 사람일까
친구란 어떤 사람일까
내 말해주지
친구란 함께 있으면 그대 자신을 돌이키게 해주는 사람이지
친구란 함께 있으면 그대에게 순수한 영혼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지
그대가 더 나아지는 것도 못해지는 것도 원치 않는 사람이지
함께 있으면 그대에게 무죄를 선고받은 죄수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지
친구란 그대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대의 천성적인 모순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지.
함께 있으면 자유로이 숨쉴 수 있는 사람이지
그대에게 약간의 허영심과 질투와 미움과 사악한 기질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주는 사람이지
그대의 결점을 털어놓아도 그것들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있는 충심의 바다에 풀어버리는 사람이지
그는 그대를 이해해 주지 그대는 그대에게 조심하지 않아도 되지
그대는 그대를 욕해도 되고 소홀히 해도 되고 용서해 주어도 되지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는 그대를 보고 알고 사랑하지
친구? 친구가 어떤 사람이냐구? 바로 이런 사람
한번 더 말하지만 함께 있으면 그대 자신을 돌이키게 해주는 사람이 친구지
그러나 친구의 가장 좋은 점은 그와 함께 침묵을 지킬 수도 있다는 거지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지. 그는 그대를 좋아하니까
그는 뼈를 깨끗이 씻어주는 불과도 같지. 그는 그대를 이해해주지
그는 그대를 이해해주지 그대는 그와 함께 울고 그와 함께 노래하고
그와 함께 울고 그와 함께 노래하고 그와 함께 웃고 그와 함께 기도
할 수도 있지
ㅡ 제임스
/ 2021.07.12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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