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78) 《협궤열차》에 실려있는 윤후명의 중편소설 「누란의 사랑」을 읽었다.
이제 ㅎ과 동거하기 전에 만난 다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만남의 성격 때문에 그 여자는 이니셜조차 밝히지 않기로 한다. 우리가 만나서 함께 지낸 것을 아직 어떻게 정의 내릴 자신이 없기도 한 것이다.
그 방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지지부진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눅눅하게 습기가 차고, 채광이 되지 않은 그 방에서의 생활은, 그러나 뜻이 같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동거라고 하기보다는 동서(同棲)생활이라고 하는 편이 좀더 적확한 표현일 듯 싶다.
(중략)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얼마를 구태여 따진다면 두 달 열흘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가 그렇게 꿈꾸어 왔듯이 또한 헤어짐을 꿈꾸어 왔다는 말이 된다. 내가 그날 밤 경찰관에게 끌려, 아래만 겨우 어떻게 가리고, 여관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누란. 아버지가 꼭 그곳으로 갔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서역땅 그곳으로 가는 한 사내를 머릿속에 그렸다. 아울러 양파꽃과 파꽃이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어도, 파를 그렇게 만지기 힘들어하던 그녀를 생각했고 또 파꽃이 피어있던 그 여관을 생각했다. 누란은 폐허가 된 오아시스 나라였다. 그 여관도 지금쯤 흔적없이 뜯겼을 것이다. 그 사랑은 끝났다. 그리고 누란에서 옛 여자 미라가 발견된 것은 다시 얼마가 지나서 었다. 그 미라를 덮고있는 붉은 비단조각에는 천세불변(千歲不變)이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언제까지나 변치 말자는 그 글자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미라는 미라에 다름이 아닌 것이었다.
미라와 그리고 언제 시들지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이 피는 나라.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만남인가. 세상 모든 만남이 그런 것인가. 아니, 폐허와 같은 사랑도 어떤 섭리의 밀명(密命)을 띠고 있는 것인가.
《소설문학》, 1984.01 / 1995년 부분 수정
「누란의 사랑(樓蘭)」
[해설]
윤후명의 소설. 1984년에 발표한 소설 「누란」을 개작한 중편소설로서, 제3회 소설 문학상 수상작이다.
어느 평론가의 지적처럼 윤후명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비슷한 분위기와 연역적 구도를 갖추고 있다. 그의 작품은 거의 두 개의 축(軸)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무미 건조하고 숨막힐 것 같은 소시민적 일상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인 고대의 풍경이나 관념적인 이상이다.
가령, 「돈황의 사랑」에서, 주인공은 아내가 직장에 나가면 할 일 없이 낮잠만 자거나 친구를 만나 술을 먹거나 하는, 전직이 잡지사 기자인 실업자이다. 또, 주인공이 고등학생 때 여러 번 가출을 했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가 답답하고 무의미한 일상에서 얼마나 벗어나고자 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누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여러 번 가출을 시도했으나, 지금은 한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역(西域)의 돈황 석굴이나 서역의 누란과 같은, 그 무언가를 동경하고 있으며 소시민적 일상에서 벗어나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 또한 실패하거나 좌절한다. 끝없는 사막 같은 긴 하루를 걸어온 사자는 바로 ‘나’였고, 여관은 흔적 없이 뜯겼으며, 사력을 다해서 벗어나고자 했던 일상을 향해 사력을 다해 되돌아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누란’에서 미라를 덮고 있던 천에 새겨진 천세불변(千歲不變)이란 글자가 암시하듯 허무하고 또한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란의 사랑」의 끝부분은 버림받은 사랑의 갈등이 내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폐허가 된 누란에서 미라가 발견되는 장면은, 현실과 환상을 접합시킴으로써 허망한 것에서부터 현실을 의미있게 부각시켜 준다.
▶ 주제 : 인간의 만남과 인연, 그리고 사랑의 종말과 허망함.
[줄거리]
주인공 ‘나’는 한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다. 엄연히 말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듯 서식(棲息)하고 있는 동루(東樓)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다. 바다에 도착한 우리는 재개발 사업으로 곧 헐리게 될 낡은 여관에 여장을 풀고 식당에 갔었다.
우리의 동거 생활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 것인데,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생각할 때마다 그녀와 함께 어머니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있었다. 집 매매 일로 자주 드나들던 김씨와 내연의 관계인 어머니와 항상 어머니의 냉대를 받으며 문제 학생으로 다섯 번이나 가출을 했던 ‘나’는 서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어머니를 만나러 가면서 어머니와의 확고한 이별을 의미하는 선물로 새 의족을 가져갔다. 선물을 뜯어 본 어머니는, 지금까지 한번도 꺼내지 않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광복군의 밀정이었는데, 건강이 위독한 상태에서 중국 장가구에서 서역으로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달고 있던 헌 의족에서 그 동안 간직해 온 아버지의 필적이 적힌 두루마리를 꺼내 주었다.
여름이 지나고 동거하던 그녀는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다. 우리가 묵었던 바닷가 여관이 흔적 없이 뜯긴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끝났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갔을지도 모르는 서역의 폐허가 된 오아시스의 나라 누란(樓蘭)에서는 여자의 미이라가 발견되었다.
■ 누란(樓蘭)으로 가는 길 / 강동수
황사가 불어온다
모래바람은 고비사막을 넘어와
내 마음속에 모래기둥 하나 세운다
먼 길을 돌아온
낙타의 울음소리 잠든 혼을 깨우고
아직 눈뜨지 못한 해 그림자는
하늘에서 길을 잃는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건너온 바람은
집집마다 사막의 전설을 알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흉노족의 말발굽을 피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다
열사의 땅으로 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
도시는 모래성을 쌓고
조금씩 허물어져간다
길을 나서면 도시는 거대한 사막
신기루 같은 잿빛 가로수를 지나면
만날 것 같은 문명의 도시
실크로드로 길을 떠난다
이천 년 세월을 넘어 모래사막에 묻힌
누란왕국에 도착하면 꿈꾸던 오아시스
그 곁에 내가 묻어둔
청춘의 푸르른 꿈이 자라고 있을까
방황하는 로푸노르 호수가
두고 온 고향 누란으로 발길을 돌리듯이
길 잃은 발걸음이 사막에서 길을 찾는다
/ 2021.07.13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