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인을 위한 노래 / 문정희
당신들은 모르실 거예요
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
이땅의 젊은 남자들은
누구나 군사분계선으로 가서
목숨을 거기 내놓고 한 시절
형제라고 부르는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절박하게 고통과
그리움을 배운답니다
그래서 이땅의 여자들은
소녀 때는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쓰고
처녀 때는 군대로
면회를 간답니다
그 시차 속에 가끔 사랑이
엇갈리는 일도 있어
어느 중년의 오후
다시 돌아설 수 없는 길목에서
군복 벗은 그를 우연히 만나
서로 어쩔 줄 몰라하며
속으로 조금 울기도 한답니다
서로의 생 속에
군사분계선보다 더 녹슨
어떤 선을 발견하고
슬퍼한답니다
당신들은 모르실 거예요
이 땅의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
ㅡ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감상]
군인은 한때 ‘군바리’였다. 군인은 장교와 직업군인에게나 통용되는 신분호칭이었다. 적어도 내가 군대생활 할 때까지는 그랬고, ‘이등병의 편지’가 목청껏 불리어지고 탈영과 총기사고가 멈추지 않는 한 어쩌면 지금도 그럴 것이다. 나도 성탄절이 가까울 무렵 치약과 칫솔, 알사탕과 비스킷 따위가 들어있는 위문대를 받고서 잠시 환하게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한 여고생의 위문편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를 읽고서 일부러 막사 밖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본 기억도 있다. 하지만 소녀를 동경하거나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연애편지 하나를 알고 있다. 그 편지를 처음 읽은 건 중 2때 집안에 뒹굴던 <世代>라는 과월호 잡지(1964년 9월호로 추정)에서였다. 당시 하급공무원인 아버지가 정기구독하며 쌓아놓기만 한 책이 뒤늦게 심심한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권말에 실린 <캄캄한 무덤에 잠들게 하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 형식을 빌린 소설에서의 편지글 12통이다. 그 편지는 서울 문리대 천문기상학과 4학년에 다니다 입대한 최영오(1938년~1963년) 일병과 그의 애인 이화여대생 장현숙이 주고받은 것으로 최영오가 부대 내의 선임병사 2명을 총기로 살해한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애인이 보내온 연서를 선임병 2명이 번번이 가로채 먼저 뜯어보고 내무반원들 앞에서 낄낄거리며 공개적으로 조롱하자, 최 일병은 소원수리를 통해 이를 항의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나 되레 구타를 당했다. 이후에도 심한 모욕과 부당한 기합에 시달리다 분을 참지 못한 그는 1962년 7월 7일 저녁 사단사령부에서 열린 위문공연을 본 후 내무반으로 들어오는 정 모 병장과 고 모 상병을 향해 M1방아쇠를 당겨 살해한 후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최영오가 명문대 재학생이란 사실과 발단이 된 그 연애편지 내용의 일부가 공개됨으로써 낭만적 호기심을 부추긴 것이다.
군사법정에 선 최 일병은 “두 사람을 살해한 순간 나 또한 죽은 지 이미 오래다. 다만 아무리 군대라 해도 인간 이하의 노리개처럼 갖고 노는 잔인함을 향해 총을 쏘았을 뿐”이라고 울부짖었으나 군법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대한어머니회와 각계각층에선 구명을 위해 백만인 서명운동에 나섰고, 서울대 재학생과 백철, 박화성, 최정희 등 많은 문인들이 구명에 가세했으나 소용없었다. 상고심의 대법원에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을 확정지었다. 당시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군부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었으므로 ‘군기 확립’의 서슬에 사회의 탄원은 먹혀들 수 없었다.
이듬해 3월 18일, 서울 근교 수색의 군 사격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집안은 1987년 8월까지 용공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혀 사회로부터 격리 조치되었다. 최 일병은 죽기 직전 ‘내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고 말했고, “제가 죽음으로써 비인간적인 우리 군대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군대로 거듭나길 바랄 뿐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 일병의 사형은 급하게 집행되었다. 심지어 처형 3시간 전에 형인 최영수씨가 그를 면회했는데 “다음 면회 땐 어머니와 조카를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 사실로 미뤄보면 최 일병 자신도 3시간 뒤에 자신이 처형되리라고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편과 사별 한 뒤 20년간 홀로 행상을 하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는 사체 인수 통지서를 받아들고 충격을 받아 그날 밤 늦게 한강 절벽에서 투신자살했다. 평소 자주 빨래하던 마포강변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안에는 ‘높으신 선생님들, 내가 영오대신 가겠으니 제발 내 아들은 살려주세요’라고 적힌 유서가 들어 있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사회가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최 일병의 애인이었던 장현숙은 죄책감에 평생 독신으로 살고자 마음먹었고, 이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이대 측에선 자립기반 마련을 위해 문과대학에서 약학대학으로 전과토록 배려하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최영오 일병 사건을 다시 접한 것은 1976년 모 헌병대 수사과에서 졸병으로 복무할 때 우연히 열람한 사건기록에서다. 최영오 일병은 서울대 4학년 재학중 휴학하고 1961년 단기 학보병으로 입대하여 보병 15사단 무반동총중대에 전입되어 복무하던 자원이었다. 당시 ‘學保兵’은 '학적 보유병'의 준말로서 60년대 초 조국의 재건을 위해서는 인재들이 군복무를 빨리 마치고 사회에 나가서 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제도이다. 군복무기간이 36개월이었던 당시에 절반인 1년6개월 만 복무하고 나머지 기간은 장기휴가 형식으로 제대시키는 제도로서 명문대 재학생들에게 준 엄청난 특혜였다.
최 일병 역시 제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병사들에겐 못 배운 것도 한이었을 터인데, 그 특혜가 탐탁하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들에겐 분명 ‘좆같은 세상’이었다. 그래서 학보병들은 군 생활을 짧게 하는 대가로 고참병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어릴 때 잡지를 통해 읽고 느꼈던 최 일병 사건에 대한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솔직히 당시엔 희생된 병사들보다는 최 일병의 죽음에 동정과 안타까움이 훨씬 짙었다. 둘이서 주고받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연애편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맑게 개었습니다.” 식의 하늘과 별과 바람을 노래한 내용들이었다.
최 일병은 옥중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물론 연서로 인한 살인이 표면적인 동기인 것은 부인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살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이하의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또 그것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저 인간됨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노리개를 갖고 그것을 향락하려는 씹고 싶도록 잔인한 근성을 삭제하고 싶었다.”며 울부짖었다. 결국 죄를 개인에게 물을 수밖에 없겠지만 어느 일방의 잘못이기 전에 강제적 병역제도가 존재하는 한, 상관이 부하를 소유하고 부하는 상관에게 종속되는 ‘군바리’의 신분이 유지되는 한, 지금도 젊은이들은 그 속에서 신음하고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가 여러모로 좋아진 건 사실이다. 우리 때에 비하면 복무기간도 그렇거니와 구타도 거의 사라졌고 환경도 그때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 병장 월급은 ‘무려’ 40만원이 넘는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에 신성한 국방의무를 수행하는 청춘들에게 당연한 개선이리라. 그럼에도 가장 연애빨을 받을 시기 이 땅의 남자들은 군바리로 ‘좆뺑이’치고 여자들은 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다. 그러다 더러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기도 했을 것이다. 반세기를 건너온 지금 우리는 똑같은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최 일병 때도 그랬고 우리 때도 교련 이수만큼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받는 사병들은 그렇지 못한 고참병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했다. 우리 스스로 용서하기 힘든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병역특례문제만큼은 아무리 깊게 고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 권순진
[출처] 권순진 블로그 《詩하늘 통신》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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