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물도감 / 송태한
빼곡한 책시렁에 갇혀있던
큼직한 책을 펼쳐 들면 불쑥
숨어있던 꿀벌이 앵앵거린다
책갈피 잎사귀 틈에서 살며시
모시범나비 날개를 편다
범부채 벌개미취 노루오줌 광대수염
가슴에 이름표 단 유치원생들처럼
앙증맞은 꽃들이 줄지어 얼굴 내밀고
산등성이 구름 몰려가듯
계절이 성큼 건너간다
상수리나무 타고 내려온 다람쥐가
총총걸음으로 책장을 질러간다
식물도감 마지막 쪽
제철 만난 수목원 귀퉁이엔
수줍은 뱀딸기처럼 어느 틈에
꿈꾸듯 나도 기대앉아 있다
[감상]
빼곡한 책시렁에 갇혀있던 식물도감 안에는 채집한 모든 식물이 살고 있다. “큼직한 책을 펼쳐 들면 불쑥/ 숨어있던 꿀벌이 앵앵거린다/ 책갈피 잎사귀 틈에서 살며시/ 모시범나비 날개를 편다”에서 만난 범부채, 벌개미취, 노루오줌, 광대수염… 시인의 서재는 금세 숲이 되어 상수리나무 타고 내려온 다람쥐가 총총걸음으로 책장을 질러간다. 뛰고 구르며 날아간다. 이 얼마나 생동감 있는 광경인가. 시인이 선택한 활유법(活喩法)으로 시는 꿈틀거린다.
“식물도감 마지막 쪽/ 제철 만난 수목원 귀퉁이엔/ 수줍은 뱀딸기 틈에 어느새/ 꿈꾸듯 나도 기대앉아 있다”고 고백한다. 물경(勿驚), 현실은 픽션이 되고 아름다운 상상에 독자들도 아마 그 숲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힘든 현실에서 우리는 자연을 통해 꿈을 꾸고 힘을 얻는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은 그 자체로 빼어난 작품이다. 송태한 시인은 상상의 힘으로 숲을 불러오고 찌든 현실을 승화시킨다. 시인에게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감성의 필터”가 있다. 상상을 도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역할을 감수하여 자연에 한발 다가서도록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연출된 상황을 통해 독자들은 숲으로 초대되어 시인이 만든 작품 속에서 자연의 호흡을 느끼며 현실에서 일탈하게 될 것이다. “상상과 공상은 현실에 기록될 수 없는 허상의 것이 아니라, 예술적 작업을 이끄는 강력한 동기가 되고, 어느 시점에서 그 효과를 발휘하는 실존”이 된다고 한다. 숱한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저 식물도감 안에 정답이 있다.
글=시인 마경덕
■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 시집『전쟁광 보호구역』(지혜, 2012)
[감상]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예전엔 어린아이 장난감도 성별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었다. 인형은 여자아이의 전유물이고 총과 칼은 남자아이가 반드시 갖고 놀아야할 장난감이었다. 당연히 여자아이는 소꿉놀이를, 남자아이는 전쟁놀이를 즐겼다. 전쟁놀이는 좋게 말해서 파워게임이지만 엄밀하게는 폭력게임이다. 이런 놀이에 빠지다보면 원초적 공격본능과 결합해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고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어릴 때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던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어른이 됐을 때 폭력에 물들 가능성이 2.6배나 더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래서 장난감 무기, 폭력적인 만화, 전쟁놀이가 담긴 CD를 책으로 바꿔주는 행사가 열린 적도 있었다.
지금도 인터넷에선 잔혹한 폭력게임이 넘쳐나고 레저스포츠로 자리 잡은 모의전투 형식의 서바이벌 게임이 각광을 받고 있다. 강원도 양구의 한 육군 전투훈련장이 '안보의식고취'와 '올바른 통일관 확립'을 겸한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도 있다. 첨단 마일즈 장비가 부착된 전투복을 입고 실전과 같은 전투체험이 가능해 재미를 더해준다고 하였다. 서바이벌게임의 기원은 베트남전쟁 종식 후 전장의 화약 냄새를 잊지 못한 퇴역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향수 자극용 게임이었다. 처음엔 실물총기에 공포탄을 사용함으로써 게임의 의미보다는 전쟁터를 재현하여 자신들의 추억을 되살려보자는 목적이었는데 나중엔 돈을 내고 즐기는 놀이로 둔갑하였다.
전쟁에 거부감을 보이던 중산층들에게도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는 삶을 무한경쟁, 각개약진, 승자독식이라는 살벌한 전쟁터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인류는 전쟁의 역사다. 입으로는 누구나 평화를 외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거듭해 저질러왔다. 장난처럼 시작하여 놀이처럼 진행된 전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전쟁과 무기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어쩌면 카인의 후예인 우리들 뇌 안에 살상과 파괴의 DNA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광적으로 전쟁과 테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파리에서의 저 끔찍한 연쇄테러를 자행한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IS)나 전쟁놀이에 빠져있는 김정은 군부 집단은 평균치를 훨씬 초과한 악성DNA가 내재되어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어릴 때부터 과도하게 전쟁 장난감을 갖고 놀아 '전쟁광' 인자가 배양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여름철 물총축제도 아니고 엊저녁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음을 알고서 물대포의 발포를 명령한 사람이나 극소수 극렬 시위꾼에게도 그런 인자가 없다고는 말 못할 것이다. 이 전쟁의 광물성을 생명의 근원인 식물성으로 되돌려놓을 방도는 없을까.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아기자기한 '전쟁광 보호구역'을 진짜로 하나 만들어 몰아넣을까 보다.
글=권순진 시인
■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감상]
1.
많은 사람들을 울린 동화 '강아지똥', '몽실 언니',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엄마 까투리' 등으로 유명한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 선생의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입니다. 제목만 보면 이게 무슨 내용인가 싶은 시이지만, 찬찬히 읽으면 정말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읽으면 읽을수록, 권정생 선생께서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화합하며 평화적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께서 지으신 동화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런 시를 지을 만한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강아지똥만 하더라도 정말 아무런 쓸모가 없던 존재처럼 보이던 강아지똥이 아름다운 민들레꽃을 피우는 양분이 되는 감동적인 자기 희생을 하는 내용을 그렸고, 몽실 언니 역시 매우 힘겨운 하층민들의 생활을 그려냈지만 그럼에도 악착같은 생명력을 가진 민초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줬습니다.
어찌 보면 나이를 먹고 나니 권정생 선생 같은 분이 지으신 이야기가 진짜 나이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 대부분이 어두운 현실을 그려냈지만 그와 동시에 약간이나마 보이는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 말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에는 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것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그런 이상향에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는 생각 역시 하곤 합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애국자'라는 개념이 '국가'라는 개념에 사람들을 나누어 파편적으로 종속시키는 개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세계인 모두가 휴머니즘 하에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상상을 하며 오늘 이 시를 읽어봅니다.
글=꿈꾸는 작가 (블로그 글)
2.
2018년 11월,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한 이후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군에 입대하는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질타에 국방부에서는 ‘종교적 병역거부’라 불렀다가 인권위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군 입대가 ‘국방의 의무’라는 것과 관련하여 국민으로서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을 애국자라 칭송하기까지 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헌법 제19조에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양심’이란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을 뜻하니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역시 헌법이 보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듯이 납세, 교육, 근로 그리고 국방은 국민의 4대 의무이고, 현행 병역법 제88조 1항에서는 ‘현역 입영 또는 소집통지서를 받고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않으면 3년 이하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헌법재판소에서는 이 조항을 지난 2004년 8월과 10월, 2011년 8월 그리고 2018년 6월 네 차례에 걸쳐 모두 합헌이라 결정한 바가 있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2018년 한 해에만 남북의 양 정상이 세 번 만났고 한반도는 바야흐로 평화 분위기로 들어서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헌법에 명시한 대한민국의 부속도서로 같은 민족이자 통일의 상대인 동시에 군사적으로는 적이며, 아직은 남북이 대치하며 ‘휴전(休戰)’이란 전쟁상태에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의 의무는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권정생의 시처럼 이 되어야 한다. 물론 시 속 ‘애국자’는 일반적 의미의 ‘나라사랑’이 아니라 바로 전쟁, 군대, 국방의무, 입대자…를 뜻한다. 시인은 ‘애국자’를 그런 뜻을 담아 일컫기에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고 단언한다. 즉 전쟁, 군대, 국방의무, 입대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란 말이다. 운문이 아니라 산문으로 된 시는 문장부호도 없이 시인의 생각을 단숨에 뱉어낸다.
전쟁이 없다면 핵무기도 없을 것이요, 그렇게 되어 국방이 없다면 군 입대도 당연히 없지 않겠는가. 그 다음 벌어질 일들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어머니들도 아들을 군에 보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젊은이들은 꽃, 연인, 자연, 무지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애국자’가 안 되면 즉, 군대에 가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요,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는 말이다.
정말 국방의 의무가 없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꼭 의무라서가 아니라 국방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단순하지 않다. 시인은 바로 사랑 그리고 아름답고 따사로운 세상을 그린다. 어쩌면 역설이리라. 시인은 병역 거부와 관련하여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입대하라고 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첫 문장은 ‘세상이 평화롭다면 이 세상 그 어느 나라도 군에 입대하는 애국자는 없을 것이다’로 해석된다.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나,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하여 나는 ‘병역을 거부하지 말고 그냥 양심적으로 한국을 떠나라’고 극단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역시 시인은 다르다. 역설을 통해 더 적극적인 행동을 유도하고 있지 않은가. 맞다. 사랑이 넘치는, 아름답고 따사로운 세상 - 그런 세상을 이룰 때까지 우리는 우리나라를 지켜야 한다.
글=이병렬 시인
/ 2021.07.21 편집 택
https://blog.daum.net/mulpure/15856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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