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자 / 박노해
여행을 나서지 않는 이에게
세상은 한쪽만 읽은 두꺼운 책과 같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밖의 먼 곳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
나 자신마저 문득 낯설고
아득해지는 그 먼 곳으로
하지만 낯선 땅이란 없다
단지 그 여행자만이 낯설 뿐
가자 생의 여행자여
먼 곳으로 저 먼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깊은 어둠 속으로 빛나는 길을 따라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나 자신에게 가장 낯선 자인
나 자신을 탐험하고 찾아내는 것
그 하나를 찾아 살지 못하면
내 생의 모든 수고와 발걸음들은 다
덧없는 길이었기에
■ 여행 / 도종환
처음보는 사람과 한 자라에 앉아서 먼 길을 갔습니다
가다가 서로 흔들려 간혹 어깨살을 부대기도 하고
맨다리가 닿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몇마디씩 말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한참씩 말을 않고 먼 곳을 내다보곤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우리 가야 할 길에도 어둠이 내리고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가 내려할 곳에서 말없이 내려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얼마쯤은 함께 왔지만 혼자 가는 먼 여행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이들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그런 것처럼
■ 여행은 때로 / 김재진
때로 여행은 그럴 때 있어라
낯선 이들 속에 앉아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보내기 싫은 사람을 보내야 할 때 있어라
지구의 반대편을 걸어와 함께 시간을 나누던
친구와 작별하듯 여행은 때로
기약 없는 이별일 때 있어라
닫혀진 문 밖으로 음악이 흐르고
때로는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모르는 여인을 안고 싶을 때 있어라
한때는 내 눈이 진실이라 믿었던 것
초처럼 녹아내려 지워질 때 있듯이
여행은 때로 행복한 도망일 때 있어라
음음음, 소리내어 포도주를 음미하듯
눈감고 바라보는 향기일 때 있어라
숨죽인 채 들어보는 침묵일 때 있어라
■ 여행으로의 초대 / 김승희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모르는 도시에 가서
모르는 강 앞에서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모르는 오리와 더불어 일광욕을 하는 것이 좋다
모르는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여기가 허드슨 강이지요
아는 언어를 잊어버리고
언어도 생각도 단순해지는 것이 좋다
모르는 광장 옆의 모르는 작은 가게들이 좋고
모르는 거리 모퉁이에서 모르는 파란 음료를 마시고
모르는 책방에 들어가 모르는 책 구경을 하고
모르는 버스 정류장에서 모르는 주소를 향하는
각기 피부색이 다른 모르는 사람들과 서서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너는 그들을 모르고 그들도 너를 모르는
자유가 좋고
그 자유가 너무 좋고 좋은 것은
네가 허드슨 강을 흐르는
한포기 모르는 구름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고
모르는 햇빛 아래 치솟는 모르는 분수의 노래가 좋고
모르는 아이들의 모르는 웃음소리가 좋고
모르는 세상의 모르는 구름이 많이 들어올수록
모르는 나의 미지가 넓어지는 것도 좋아
나는 나도 모르게 비를 맞고 좀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모르는 새야 모르는 노래를 많이 불러다오
모르는 내일을 모르는 사랑으로 가벼이 받으련다
/ 2021.05.16 편집 택
https://youtu.be/xCcKEajVv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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