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2094

[명작수필] '그날 밤 눈사람' 박동규 (2021.02.12)

■ 그날 밤 눈사람 / 박동규 내가 6살 때였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는데, 아버지는 글을 쓰고 싶으셨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방에 상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책상이 없었던 아버지는 밥상을 책상으로 쓰고 있었죠. 어머니는 행주로 밥상을 잘 닦아서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책상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세 달 된 여동생을 등에 업히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불 같은 포대기를 덮고서는 "옆집에 가서 놀다 올 게!" 하고 나가셨습니다. 나는 글 쓰는 아버지의 등 뒤에 붙어 있다가 잠이 들었고 얼마를 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나를 깨워서 눈을 떠 보니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깨우더니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

[명작수필] '어머니', '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 박동규 (2021.02.10)

'' ■ 어머니 / 박동규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6.25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지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

[명시감상]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모음 (2021.02.09)

■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ㅡ 한 줄도 길다, 하이쿠(俳句) 모음 한 줄의 시에 찰나와 우주를 담다 촌철살인, 자연과 해학 그리고 고독의 노래 번개처럼 우리네 삶을 파고드는 침묵의 언어들 파리, 벼룩, 개구리처럼 약하고 천대받는 존재를 향한 동정심과 연대감 천대받는 것들, 구박받는 것들, 버림받은 것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서로 모여 정답게 이야기 나누고 평등하게 어울린다 참 별난 세계, 또 하나의 열린 아름다운 세상 봄에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ㅡ 오토쿠니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ㅡ 바쇼 눈을 감으면 젊은 내가 있어라 봄날 저녁 ㅡ 교시 새는 아직 입도 풀리지 않았는데 첫 벚꽃 ㅡ 오니쓰라 그럴 가치도 없는 세상 도처에 벚꽃이 피었네 ㅡ 잇사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

[동시감상] '입김' 신형건, '할미꽃' '고무줄놀이' 김철순 (2021.02.06)

■ 입김 / 신형건 미처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추운 겨울날 몸을 움츠리고 종종걸음 치다가 문득, 너랑 마주쳤을 때 반가운 말보다 먼저 네 입에서 피어나던 하얀 입김! 그래, 네 가슴은 따뜻하구나 참 따뜻하구나 ■ 할미꽃 / 김철순 봄이 오면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 위의 할머니 하늘나라 가신 할머니들 모두모두 지팡이 짚고 땅으로 내려오신다 ■ 고무줄 놀이 / 김철순 고무줄을 길게 묶어서 고무줄놀이를 했어 친구 둘이 고무줄을 맞잡고 팽팽하게 당기면 눈앞에 펼쳐지는 수평선 나는 폴짝 폴짝 수평선을 뛰어넘는 파도가 되었어 / 2021.02.06 편집 택

[소설읽기] '발가락이 닮았다' 김동인 (2021.02.05)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4) 김동인의 『배따라기』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읽었다. ◆ 전체 줄거리 매우 불안정한 회사의 가난한 월급쟁이인 M은 서른 두 살이 되도록 혼인을 하지 않은 노총각이다. M은 학생시절부터 대단히 방탕한 생활을 거듭한다. 성욕을 이기지 못해 유곽으로 달려가곤 하다가 결국은 성병으로 인해 생식능력을 잃고 만다. 그러한 M은 어느 날 의사인 나를 찾아와 자신의 생식능력 여부를 묻고 가고, 그 며칠 후 M이 친구들 몰래 혼인을 하였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M이 결혼한 지 2년이 거의 다 된 어느 날 저녁 M을 만난 나는 침통해하는 그에게서 생식능력 여부를 검사하겠다는 말을 듣는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M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놀라며, 며칠 전의..

[명시감상] '가을' 최옥자, '어느 벗에게' 이해인 (2021.02.05)

■ 어느 벗에게 / 이해인 사람들이 싫다는 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말 너무 자주 하진 말아요 일단은 믿어야만 믿음도 생긴다니까요 다 귀찮아 무인도에나 가서 혼자 살고 싶다는 말도 함부로 하진 말아요 사람들이 없는 곳에 가는 즉시 사람들이 그리워질 거예요 세상은 역시 사람들이 있어 아름다운 걸 다시 느낄 거예요 ■ 가을 / 최옥자 가을 햇살을 맞으며 걸으며 말하는 말이 너무 행복하오 이러다가 누가 먼저 손을 놓으면 어떡하지? 할 수 없지 내가 먼저 가면 뒤따라 와요 당신 먼저 가면 내가 따라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렇게 익어가며 삽시다 '그래 그렇지?' 날씨가 참 좋아요 행복했던 그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나 혼자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익은 열매 되어' ㅡ 《강원도 양구군 ..

[소설읽기] '은냇골 이야기' 오영수 (2021.02.04)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6) 오영수의 『갯마을』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은냇골 이야기'를 읽었다. '은냇골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뼘질로 두 뼘이면 그만인 하늘밖에는 어느 한 곳도 트인 데가 없다. 깎아 세운 듯한 바위. 벼랑이 동북을 둘렀고 서남으로는 물너울처럼 첩첩이 산이 가리웠다. 여기가 국도에서 사십여 리 떨어진, 태백산맥의 척추 바로 옆 골미창 은내[隱川谷]라는 마을이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그러고는 밭두렁으로 나온 박가는 허리에서 곰방대를 빼들고, "그런데 형, 씨야 어딜 갔든, 이 밭 소출은 내 것이지 응, 형?" "아암, 그야 뭐 여부가 있겠나!" "아따 이 사람, 나두 두어 가마 팠네, 뭐 달랄까 봐 그러나......" 그러고는 둘이서 마주 보고 웃은 일이 있었다. 김 노인은..

[소설읽기] '잔해' 송병수 (2021.02.04)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8) 송병수의 『쇼리 킴』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잔해'를 읽었다. '잔해'는 이렇게 시작한다. 삼천 피트의 고도. 김진호(金鎭浩) 중위는 지상으로 급강하하고 있었다. 차디찬 영하(零下)의 암흑 속을 급강하하며 그는 다급히 립코드를 잡아당겼다. 낙하산이 활짝 펴졌다. 순간, 몸뚱이가 허공에 탁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ㅡ ROK, A27. A는 전대 표시, 27은 비행기 번호. 다름아닌 그의 무스탕기였다. 그는 자기 몸뚱이가 박살이 난 것처럼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그는 머너지듯 주저앉으며 알루미늄판을 쓸어 안았다. 너무나 서러워, 너무나 억울해 왈칵 울음이 터졌다. 흐는껴. 물결 이는 그의 등에 수북이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함께 어스름이 깔려 왔다. ..

[소설읽기] '탈주병' 송병수 (2021.02.04)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38) 송병수의 『쇼리 킴』에 실려있는 단편소설 '탈주병'을 읽었다. '탈주병'은 이렇게 시작한다. 막사 안에 벌겋게 단 난로의 열이 고루 퍼져 야전잠바가 거추장스러울 만큼 훈훈했으나 바닥은 얼어 굳은 땅덩이 그대로였다. 거기에 몇 시간째 박한서(朴漢緖)는 꿇어앉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캄캄한 어둠 속, 굽어 보이는 멀리 시가의 불빛이 아물거렸다. 저기가 서울이다. 거기 내 집이 있다. 그러나 선뜻 내딛지도 못한 채 또 이제는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 채 한서는 칵 울음을 터뜨렸다. 흐는끼는 어깨 위에 눈송이만 마냥 쌓여 갔다. ☆ 송병수 소설가 ▲ 1932년 경기도 개풍에서 출생 ▲ 1950년 군 입대 참전, 그후 한양대학교 졸업 ▲ 1957년 《문학예술》..

[소설읽기] '무정' 이광수 (2021.02.04)

♤ 오늘은 한국소설문학대계(2) 이광수의 『무정』에 실려있는 장편소설 '무정'을 다시 읽었다. 이광수의 '무정' 은 근대 문학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1910년대 개화한 조선의 청춘 남녀들의 사랑을 소재로 하여 신교육과 자유연애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의지나 계몽 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무정》 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 시 사 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리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남의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고 ..